고레에다 감독 "일본 콘텐츠 질 낮은 것 들통났지만 개혁 어려워"
한국 배우, 제작사와 함께 만든 ‘브로커’를 연출한 일본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일본 콘텐츠의 질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이 들통났지만, 개혁은 참 어렵다”며 자국 콘텐츠 업계의 현실을 비판했다.
3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이투데이와 만나 ‘브로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고레에다 감독은 한국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선호되는 상황을 언급하며 “일본 제작자들은 분발해야겠다고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영화계에 큰 관심을 보여온 고레에다 감독은 ‘친한파 일본 영화감독’으로 표현되곤 한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원더풀 라이프’,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세 번째 살인’,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등 연출작이 다수 초청되면서 여러 차례 부산을 찾았고, 2019년에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수여하는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받았다.
고레에다 감독은 코로나19로 집 안에만 머물던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드라마에도 깊은 애정을 갖게 됐다고 했다. 인터뷰에서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클라쓰’, ‘동백꽃 필 무렵’, ‘지옥’, ‘빈센조’ 같은 제목을 콕 짚어 언급했고, 최근에는 ‘브로커’에 출연한 배두나가 나온 ‘고요의 바다’도 봤다고 전했다. ‘브로커’ 홍보 일정으로 바빠 아직 보지 못했지만 ’나의 아저씨’의 박해영 작가가 새로 쓴 ‘나의 해방 일지’도 너무 궁금하다며 한국 드라마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드러냈다.
고레에다 감독이 ‘브로커’에 이지은을 캐스팅한 것도 한국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고 나서다. 당시 보여준 이지은의 “단순하지 않은 표현력”이 좋았다고 말했다.
“이지은이 할머니와 수어로 이야기하는 장면이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할머니가 ‘너에게 친절했던 그 아저씨는 잘 계시냐’고 묻자 안심시키기 위해 ‘밥도 사주고 잘 해준다’고 웃으며 거짓말을 하거든요. 그건 정말 복잡한, 여러 겹의 감정입니다. 사실은 본인 때문에 아저씨가 궁지에 몰리게 됐고 자신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끼면서 관계가 좋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요. 내면에는 아저씨에 대한 미안함과 본인에 대한 회한이 녹아 있는데, 연기 경험이 많지도 않고 긴 시간 훈련받지도 않은 사람(이지은)이 어떻게 그렇게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는지 놀라웠습니다.”
칸영화제에서 ‘브로커’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송강호를 두고는 “(칸영화제에서) 그렇게까지 이름이 연호 되는 아시아 배우는 아마 없을 것”이라며 그의 특별한 입지를 전했다.
“송강호와 함께 레드카펫을 걷고 있을 때 프랑스 현지에 있던 카메라맨들이 양쪽편으로 백 명 넘게 있었는데, 배우가 자기 쪽을 보게 하기 위해서 송강호 이름을 계속 외쳤어요. ‘송! 강! 호! 송! 강! 호!’ 하는데 그게 이름이라기보다 무슨 구호처럼 들리더라고요. 그런 다음에 극장 안으로 들어갔는데 또 이름이 울려 퍼지는 겁니다. 이미 스태프는 궁극의 환희 상태였죠. 이름이 계속 불리니 (저에게도) 어떤 특별한 울림이 있었었습니다. 아마 그렇게까지 이름이 연달아 불리게 되는 아시아 배우는 따로 없을 겁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선호되는 최근의 상황을 묻자 진지한 태도로 답하기도 했다.
“한국 콘텐츠의 글로벌 추세는 지금 막 시작된 것이 아니라 창작자를 중심으로 20년 정도의 시간을 거쳐 (외국의) 많은 것을 흡수하며 발전해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국 유수의 영화제, 영화감독조합(DGK)같은 단체의 활동으로 저변이 확대되고 산업(의 품질)을 끌어올리면서 개혁이 진행된 겁니다. 그런 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성과가 아닌가 합니다.”
반면 자국 콘텐츠 업계 상황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일본의 방송 다큐멘터리 연출로 영상 일을 시작해 오랜 시간 영화를 만들며 콘텐츠 업계에 몸담아온 고레에다 감독인 만큼, 뼈아프지만 기본적으로는 애정이 담긴 분석이었다.
“한국 콘텐츠가 압도적으로 재미있다는 건 일본 관객도 똑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일본 드라마는 이제 못 보겠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많고요. 지금은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국경을 넘어 다양한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됐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일본 국내용으로 제작되는 드라마는 상대적으로 질이 낮고 뒤처져 있다든가, 예산이 많이 안 들어간 것 같다든가 하는 게 들통나는 상황인 거죠.”
‘우연과 상상’, ‘드라이브 마이 카’로 2021년 열린 베를린영화제, 칸영화제에서 동시 수상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처럼 ‘새로운 힘’도 분명히 등장하지 않았느냐고 되묻자 “성별을 불문하고 30~40대의 새로운 재능을 지닌 감독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지만, 이들이 차기작을 찍을 때 충분한 예산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현실이 존재한다”고 한계를 짚었다. 젊은 감독이 제작비를 투자 받기 어려운 상황인데다가 “일본 정부가 예산을 주면 반드시 간섭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국가적으로 문화산업을 육성하고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정책이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그런 흐름이 없습니다. (정부 차원의 간섭 없는 지원을) 저는 기대도 하지 않고요.”
고레에다 감독은 일본의 젊은 감독들 사이에 생겨난 변화의 흐름도 언급했다. 글로벌 영화 작업을 위해 수년간 집을 비운 채로 작품에만 몰입해 지내는 자신을 두고 “저런 식으로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젊은 친구들도 있다”는 것이다. 농담조의 표현이 일부 섞여 있었지만, “독립영화의 예산 내에서 만드는 걸 선호하고, 규모 있는 콘텐츠는 주류가 아닌 분위기”인 건 분명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고레에다 감독은 계속해서 해외 활동을 해 나갈 예정이다. 차기작은 올해 공개 예정인 넷플릭스 9부작 시리즈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舞妓さんちのまかないさん)이다.완전한 게이샤로 거듭나기 위해 공동생활을 하는 연습생 ‘마이코’들이 머무는 공간에서 두 여성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로, 일본 만화가 원작이다.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에서 고레에다 감독은 쇼러너 역할을 맡아 3화만 연출했다. 나머지 6화의 연출은 함께 영화 일을 하는 일본 후배 감독들에게 맡겼다고 한다. 고레에다 감독은 ‘분복(分福, 복을 나눈다)'이라는 이름의 영화공동체에 속해 있는데, ‘아주 긴 변명’을 연출한 니시카와 미와 감독이 대표적인 멤버다.
고레에다 감독은 “’분복’이 그런 뜻이다. 복을 나눈다는 것이다. 내가 나눈다고 해도 간혹 안 받겠다는 이들도 있지만... 어쨌든 혼자는 외로우니까”라며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고레에다 감독이 연출한 ‘브로커’는 8일부터 국내 극장가에서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