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U 배우가 4명이나? '아바타'를 이겨버린 이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2010년 아카데미 6관왕에 빛나는 <허트 로커>
지난 2010년 3월에 열린 제82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그 어느 해보다도 영화팬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작품상 후보에 오른 10편의 면면이 워낙 화려했기 때문이다.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에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를 비롯해 코엔 형제의 <시리어스맨>,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픽사의 10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업!>, 그리고 여성 감독 캐서린 비글로우가 만든 전쟁영화 <허트 로커> 등이 후보에 올랐다.
좀처럼 한 작품에 상을 몰아주지 않기로 유명한 프랑스의 칸 영화제와 달리 아카데미 시상식은 상대적으로 다관왕이 자주 탄생하는 편이다. 따라서 촬영상, 미술상, 시각효과상을 가져간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 또는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음향편집상, 음향믹식상을 휩쓴 비글로우 감독의 <허트 로커>가 작품상을 가져갈 거라는 예상이 쏟아졌다. 하지만 두 작품이 관객들의 주목을 받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바타>의 카메론 감독과 <허트 로커>의 비글로우 감독은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부부사이였다. 만약 두 사람이 헤어지지 않았다면 2010년 아카데미 시상식은 '역대급 집안싸움'이 될 뻔 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헤어진 부부의 대결'로 많은 관심을 모았던 2010년 아카데미 작품상은 제작비 2억3700만 달러가 투입된 대작 <아바타>를 제치고 제작비 1100만 달러로 만든 여성 감독의 전쟁영화 <허트 로커>가 차지했다.
▲ <허트 로커>는 201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바타> 등 쟁쟁한 영화들을 제치고 6관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 (주)NEW
아카데미 시상식 유리천장 깨트린 여성감독
1951년생으로 전 남편 카메론 감독보다 세 살 연상인 비글로우 감독은 컬럼비아 대학 대학원에서 영화이론과 비평을 공부한 후 1978년 단편영화를 연출했다. 1987년 흡혈귀가 등장하는 공포 스릴러 <죽음의 키스>를 만든 비글로우 감독은 1990년 여성경관과 범인의 심리대결을 그린 <블루스틸>을 연출했다. 하지만 비글로우 감독의 초기작들은 흥행에서 그리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비글로우 감독은 1989년 <터미네이터>와 <에이리언2>를 연출하며 액션 감독으로 이름을 날리던 카메론 감독과 결혼했지만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2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비글로우 감독은 카메론 감독과 헤어진 1991년 드디어 첫 번째 흥행작을 만들었다. 고 패트릭 스웨이지와 키아누 리브스가 출연해 세계적으로 83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한 <폭풍 속으로>였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비글로우 감독은 이혼 후에도 카메론 감독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카메론 감독이 <터미네이터2>와 <트루 라이즈>,<타이타닉>을 연속으로 흥행시키는 동안 비글로우 감독은 <스트레인지 데이즈>,<K-19 위도우메이커> 등이 썩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거장의 전 아내'라는 타이틀을 떼지 못했던 비글로우 감독은 6년 동안 철치부심한 끝에 2008년 신작 <허트 로커>를 선보였다.
마침 카메론 감독 역시 비슷한 시기 12년을 준비한 대작 <아바타>를 개봉시켰고 <아바타>는 역대 흥행 1위 기록을 세우며 전세계 극장가를 강타했다. 하지만 비글로우 감독 역시 여성감독으로는 역대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그 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6관왕을 차지하며 본인도 전 남편 못지 않은 거장임을 증명했다. 흥행에서도 <아바타>만큼은 아니었지만 제작비의 4배 가까운 수익을 올리며 선전했다.
비글로우 감독은 2012년에도 신작 <제로 다크 서티>를 통해 또 한 번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며 명성을 이어갔다. 2017년에는 1967년에 있었던 디트로이트 폭동을 영화화한 <디트로이트>가 로마국제영화제와 전주 국제영화제 등 다수의 해외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어느덧 칠순이 된 비글로우 감독은 현재 넷플릭스 영화 <오로라>를 차기작으로 준비하며 여전히 '현역'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전쟁에 중독된 호크아이와 적응 못하는 팔콘
▲ <어벤저스>의 팔콘과 호크아이는 <허트로커>에서 이라크전에 참전한 폭발물 처리반으로 출연한다. ⓒ (주)NEW
영화 <허트 로커>는 "전쟁은 마약과 같아서 전투의 격렬함에 치명적으로 중독되곤 한다"는 뉴욕타임즈의 이라크 특파원 크리스 헤지스가 했던 말이 자막으로 흐르면서 시작된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허트 로커(Hurt Locker)는 '벗어나기 어려운 물리적 또는 감정적인 고통의 기간'이라는 뜻으로 전쟁으로 인한 부상, 패배, 스트레스로 충격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때 영어권에서는 '허트 로커에 갇혔다'고 표현한다.
실제로 <허트 로커>는 선과 악이 나눠져 화끈한 전투를 벌이고 물량공세를 통해 관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주는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들과는 거리가 멀다. 이라크전을 중립적인 시선에서 묘사하면서 폭발물 처리부대의 임무수행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전개 과정은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 들 정도. 이 때문에 <허트 로커>는 아카데미 6관왕이었음에도 국내에서는 전국 17만 관객에 그쳤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하지만 정적인 전개에도 두 주연배우의 호연은 <허트 로커>를 봐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2010년대 들어 <어벤저스>의 호크아이로 더욱 유명해진 배우 제레미 레너는 <허트 로커>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전쟁에 중독돼 가는 윌리엄 제임스 중사를 연기했다. 규정을 어기고 폭발물을 직접 해체하려 하다가 동료들을 여러 차례 위험에 빠트리는 제임스는 귀국 후 전쟁의 중독성을 잊지 못하고 다시 새로운 곳으로 자원입대한다.
제임스 중사가 전쟁에 중독돼 동료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단독행동도 서슴지 않는 캐릭터였다면 안소니 마키가 연기한 샌본 하사는 동료들의 안전과 정해진 규칙을 우선시하는 'FM군인'으로 나온다. 역시 훗날 <어벤저스>에서 캡틴 아메리카에게 방패를 물려 받는 팔콘 역으로 유명해지는 마키는 동료들을 위험에 빠트린 상관 제임스 중사와 트러블을 일으킨다. 마키는 <허트 로커>에서의 열연으로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해리슨 포드와 리암 니슨을 캐스팅하고 1억 달러의 제작비를 들였던 <K-19위도우메이커>가 6500만 달러 흥행에 그치자 비글로우 감독은 6년의 긴 준비 기간 끝에 야심작 <허트 로커>를 연출했다. 16mm필름을 사용해 전쟁영화의 거친 느낌을 강조했고 폭탄을 해체할 때 긴장감 넘치는 연출도 상당히 돋보였다. <허트 로커>는 지난 2020년 미국 의회도서관의 국립영화등기부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와 함께 등재됐다.
MCU배우 4명, <허트 로커>에서 볼 수 있다
▲ <아이언맨3>의 킬리언 역으로 유명한 가이 피어스는 <허트 로커>에서 영화 시작 10분 만에 폭탄이 터지면서 전사한다. ⓒ (주)NEW
폭탄 제거반으로 적과 마주치는 전투에 참여하는 횟수는 상대적으로 적다 해도 전쟁에 투입된 군인들은 언제나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브라이언 게라그티가 연기한 오웬 알드리지 상병은 죽음의 공포에 두려워했던 군인을 대변하는 캐릭터였다. 심리상담을 해주며 자신을 위로해주던 군의관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알드리지는 제임스 중사의 무리한 작전 때문에 다리에 큰 부상을 입은 채 본국으로 귀환된다.
<메멘토>의 레너드 셀비와 <아이언맨3>의 올드리치 킬리언, <킹스 스피치>의 에드워드 8세 등을 연기하며 이름을 알린 배우 가이 피어스도 <허트 로커>에서 제임스 중사의 전임 분대장 톰슨 중사 역으로 출연했다. 톰슨 중사는 다소 딱딱한 성격의 제임스 중사와 달리 노련하면서도 여유롭게 부대를 지휘하지만 폭탄제거에 실패하면서 영화 시작 10분 만에 유품 한 박스만 남기고 허무하게 영화에서 퇴장했다.
미혼인 샌본과 달리 제임스는 아들이 하나 있는 유부남으로 나온다. 윌리엄의 아내 코니 제임스는 영화 중반 통화장면에서 잠시 나왔다가 후반 귀환한 남편과 지내는 장면에서 또 한 번 출연했다. <허트 로커>에서 제임스의 아내 코니를 연기한 배우는 바로 <앤트맨 앤 와스프>와 <어벤저스:엔드게임>에서 와스프를 연기했던 에반젤린 린리다. 호크 아이와 팔콘, 킬리언, 와스프까지. <허트 로커>에는 MCU와 관련된 배우가 4명이나 출연한 셈이다.
거의 모든 폭탄제거에 성공했던 제임스 중사는 본국귀환을 앞둔 마지막 임무에서 폭탄제거에 실패한다. 이 때 강제로 폭탄조끼가 입혀진 민간인이 나오는데 이 역할은 이라크 배우 수헤일 다바치가 연기했다. 다바치는 2019년 <어벤저스>의 루소 형제가 제작하고 미국과 UAE가 합작해서 만든 영화 <모술>에서 테러범들과 싸우는 이라크 특수화기 전술조(SWAT) 대장으로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