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 읽기] ‘파친코’,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
Vol.235 (2022년 6월호)
글 정덕현 대중문화칼럼니스트 / 정리 이지완 기자
ⓒ애플TV플러스
애플TV플러스가 1000억 원을 투자해 제작한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는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를 살아낸 재일한인에 대한 이야기다. 어찌 보면 로컬의 역사와 문화를 소재로 다룬 것이지만 놀랍게도 전 세계가 호평을 쏟아내고 있다. 이건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첫 문장부터 당신을 끌어당기는 매혹적인 책.” 2019년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은 페이스북에 당시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소설이던 재미교포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를 이렇게 평가했다.
즉 ‘파친코’는 이미 소설로도 미국에서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서부터 1980년대까지 고국을 떠나 해외로 떠돈 재일한인들의 이야기가 미국인들에게도 이런 반향을 일으킨 이유가 궁금해진다.
게다가 애플은 ‘파친코’의 드라마화에 무려 1000억 원의 제작비를 쏟아부었다.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도 아니고 이역만리 한국의 1920년대와 일본의 1980년대를 넘나드는 이야기에 도대체 왜일까.
많은 사람들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게임’ 같은 K콘텐츠에 대한 글로벌 열풍으로 인해 ‘파친코’라는 대작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오해다.
‘파친코’의 드라마화는 작품이 주목받기 전인 4년 전 애플TV플러스가 투자를 고민한 작업이었다. 즉 K콘텐츠 열풍 이전에 기획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후광효과 없이 왜 애플은 과감한 결정을 한 걸까.
첫째는 앞서 말한 소설 ‘파친코’가 이미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보여준 가능성 때문이다. 이 작품은 출간 당시 미국 사회에서 이미 관심이 높던 ‘이민자’ 정서를 담고 있다. 이것은 오바마 전 대통령이 극찬한 소설의 첫 문장에 잘 담겨 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라는 첫 문장은 역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타국을 떠돌게 된 이민자들이 가진 공통된 정서가 묻어난다. 재일한인, 재미교포 같은 우리 국민만이 아니라 남미에서, 아시아에서 또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자리를 잡은 이민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공감대가 있는 것.
실제로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Nomadland)’나 배우 윤여정이 여우조연상을 받은 ‘미나리’는 모두 이 이민자 정서가 대중문화 영역에서 중요한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는 걸 말해준 작품들이다.
두 번째는 ‘파친코’가 가진 여성 서사가 한국이라는 로컬 문화를 담은 작품임에도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공감대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여주인공 선자가 1920년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 오사카로 넘어와 1980년대까지 파란만장한 격동기를 버텨 내고 살아온 이야기는 그래서 전쟁이나 차별, 가부장적 삶을 겪은 여성들에게는 감동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는 ‘파친코’라는 작품이 가진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을 넘나드는 글로벌한 스토리가 애플TV플러스라는 글로벌 플랫폼의 포지셔닝과 잘 어울린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파친코’의 성공이 불러온 나비효과
놀랍게도 ‘파친코’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호평이 쏟아졌다. 공개 직후 미국의 비평 사이트 로튼 토마토에서 신선도 지수 100%를 기록했고 영국 BBC는 ‘눈부신 한국의 서사시’라는 평과 함께 별점 만점을 줬다.
파이낸셜타임즈는 “지금까지 나온 애플 최고의 쇼”라는 찬사를 내놨고 미국 더버지는 “이민진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애플TV플러스의 가장 야심찬 프로젝트”라며 “문화적 정체성, 민족사, 세대 간 기억과 애도를 묻는 숭고한 서사시”라는 분석을 내놨다.
또 미국 타임은 “한·미·일 삼중 언어로 구성된 고예산 시리즈가 슈퍼 히어로와 섹스, 화려한 액션 없이 성공한다면 비슷한 다른 시리즈에 청신호를 주며 연쇄효과를 일으킬 것”이라는 전망까지 내놨다.
그리고 이런 전망은 현실로 나타났다. 할리우드에 ‘진짜 한국 이야기’를 찾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유명 OTT인 훌루는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인이 서울로 건너가 벌어지는 일을 다룬 드라마 ‘아메리칸 서울’을 제작하겠다고 밝혔다.
또 애덤 스타인먼 워너브러더스 인터내셔널 TV프로덕션 부사장은 “‘미나리’와 ‘오징어게임’은 사무실 동료들과 나누는 가벼운 대화의 주 소재가 됐다”라며 “예전엔 ‘굿닥터’처럼 한국 드라마를 미국 시장에 맞게 각색해 리메이크하려 했다면 요즘 할리우드에서는 ‘진짜 한국 이야기’를 찾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할리우드 자본이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아닌 한국의 로컬 이야기에 무려 1000억 원이나 되는 제작비를 투자하는 이런 변화를 어떻게 봐야 할까. 그건 문화 콘텐츠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글로벌화’의 한 단면이다.
전 세계가 디지털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그래서 OTT 같은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 콘텐츠들이 소비되는 과정에서 ‘로컬 문화’를 담은 콘텐츠들은 오히려 더 주목받고 있다. 치열한 OTT 경쟁에서 독보적이고 유니크한 콘텐츠를 독점하는 것이 경쟁력으로 떠오르는 상황에 로컬 문화를 담은 콘텐츠가 그 대안으로 자리한 것이다.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들도 이제는 아시아나 남미 문화 같은 요소들을 어떻게든 영상 속에 담아내려 하고 동시에 OTT들은 로컬 콘텐츠의 글로벌화를 이를테면 장르 문법을 활용한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을 통해 시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과거 국적 개념은 갈수록 그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인 이민진 작가가 원작을 쓰고 그 작품을 역시 한국계 미국인인 코고나다, 저스틴 전 감독이 연출하고 수 휴가 극본을 집필했으며 윤여정이나 김민하, 이민호와 함께 진하 같은 한국계 미국인이 연기한 ‘파친코’에 국적을 묻는 일은 어딘지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준다.
물론 제작비가 투입된 나라를 따져 미국 작품이라고 말하는 게 맞지만 작품이 담고 있는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그저 ‘미국 작품’이라는 한마디로 지워낼 수 있을까. 그래서 ‘파친코’의 등장과 성공은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라는 글로벌 시대에 더 분명해질 경제 환경의 변화를 보여주는 징후처럼 보인다. 국가 간의 대결처럼 경제를 바라보던 시대는 이미 저 멀리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