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 인육 살인마 실화로 영화 만든 고려인 4세 감독
업데이트 2022.04.26 18:40
“카자흐스탄에선 오히려 이 영화가 ‘이국적’이란 말을 들었어요. 한국 관객들은 한국 영화 느낌 난다더군요.”
한국‧카자흐스탄 합작 범죄 영화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박루슬란(41) 감독은 "한국말은 아니지만 한국영화"라고 말했다. 고려인 4세인 박 감독은 2020년 이 영화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해 "카자흐판 ‘살인의 추억’’이 연상된다"는 평가와 함께 주목할만한 신인감독에게 주는 뉴커런츠상을 받았다. 국내 개봉(21일) 다음날 전화 인터뷰로 만난 박 감독은 “20년 넘게 한국 영화계에서 활동해왔다”며 “출신은 우즈베키스탄이지만, 세계관과 보는 눈, 생각하는 게 한국과 밀접할 수밖에 없다. 그냥 해외에서 태어난 ‘한국 감독’이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태권도 10년, 부상 후 찾아온 영화
우즈베키스탄에서 나고 자란 박 감독은 초등학교 2학년부터 10년 넘게 태권도를 하다 부상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그게 영화였다. 우즈베키스탄의 사범대 한국어학과에 진학해 1학년이었던 2000년 한국으로 어학연수를 왔다. 어느 날 춘천의 한 영화관에서 불현듯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오랜 기도에 대한 대답 같았죠. 부모님, 친구들도 놀랐죠. 당시 영화감독이란 직업은 우즈베키스탄에 없는 거나 다름없었거든요.”
한국 영화 ‘괜찮아, 울지마’(2001), ‘나의 결혼 원정기’(2005) 등의 연출부를 거쳐 2006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 과정에 입학해 본격적인 영화 공부를 했다. 2012년 고려인의 정체성을 담아낸 성장영화 ‘하나안’이 그의 장편 데뷔작이다.
구소련 인육 살인마 실화…38년만에 공분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그의 아버지 고향인 카자흐스탄에서 1979년 구소련 시절 벌어진 연쇄살인마의 실화가 토대다. 여성들의 목을 자르고 인육을 먹은 범인은 당시 관료들의 결정으로 은폐됐다가 38년 뒤인 2017년 언론을 통해 직접 쓴 글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감옥이 아닌 정신병동에 수감된 범인이 자신의 존재가 언론에 노출되길 원치 않는다고 쓴 글이었다. 박 감독은 “당시 살인마가 4번이나 탈출에 성공해 어렸을 적 내가 살던 동네까지 도망쳐 왔다”면서 “사람을 죽여놓고 ‘나를 기억하지 말라’고 편지를 쓴 것에 너무 기가 막혔고 분노를 느꼈다”고 말했다.
감독 데뷔 이후에도 방송국 아르바이트 등 여러 일을 전전했던 그는 다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일념에 초저예산 제작비 5억원을 발로 뛰어 마련했고, 직접 설립한 제작사 아슬란 필름의 창립작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는 카자흐스탄 배우들과 현지에서 찍었다. 개봉도 지난달 31일 카자흐스탄에서 먼저 했다.
영화는 신입 수사관 셰르(아스카르 일리아소브)가 수사 과정에서 세상의 악에 눈뜨며 성장하고, 유일한 가족인 누나 디나(사말 예슬라모바)가 실종되며 고통 겪는 과정이 펼쳐진다.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작 ‘리바이어던’(2014)으로 주목받은 이고르 사보치킨이 베테랑 수사관 역을 맡아 작품을 중후하게 끌어간다. 실화와 허구의 비율은 3 대 7 정도라고. 주인공 셰르 남매 등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실제 범인을 검거한 형사를 직접 취재해 그때 상황을 생생히 담았다.
코미디가 주를 이루는 카자흐스탄 영화계에서 이 영화는 색다른 스릴러로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고 그는 전했다. 1970년대 거리를 재현할 제작비가 없어 실내 위주로 찍었지만, 퀄리티를 위해 촬영‧조명‧동시녹음 등 주요 제작진은 경험 많은 한국 스태프로 꾸리고 후반작업도 한국에서 했다. 넷플릭스 러시아 드라마 ‘투 더 레이크’(2019)로 주목받은 주연 아스카르 일리아소브는 “촬영장 분위기가 제가 해온 작품들과 이례적이었다”고 영화사에 전했다.
"어느 나라든 사람 속 같아…흥 많은 영화 찍고파"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완벽하지 않지만, 범인이 잘못 선택한 결과의 인생이란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구소련에 어릴 적 살면서 문제점이 없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따뜻하고 착했어요. 어느 나라에 살든 사람 속은 똑같다고 생각해요.”
“구소련 붕괴 후 제가 태어난 나라는 없어졌다”는 그는 지난해 한국 국적을 취득하며 완전히 귀화했다. 2007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홀로 된 어머니도 한국에 와 그와 함께 살고 있다.
“인생에서 장점만 생각하려고 해요. 저는 도스토옙스키 원작,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영화를 번역 없이 볼 수 있고 ‘기생충’도 자막 없이 볼 수 있어요. 다른 세상에서 왔기 때문에 다양한 시선을 갖게 된 건 좀 더 다양한 영화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차기작은 독립투사 홍범도 장군에 관한 영화나 어릴 적 좋아하던 SF 장르로 구상해보고 있다. 시나리오는 한국어로도, 러시아어로도 써나갈 예정이다. 궁극적으론 “흥이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제 본질을 100% 다 알진 못하지만 그래도 흥이 많다고 생각해요. 우리 한국 사람들 다 흥이 많죠. 어떤 식으로 표현할지가 숙제지만 어떤 장르든 살아있는 영화, 재밌는 영화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