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 온 파이어’
정장열 편집장
2022-03-04 오전 11:55:20
한 페친의 권유가 떠올라서 지난 삼일절 아침 넷플릭스에서 ‘윈터 온 파이어(Winter on Fire)’라는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 삼일절 기념사를 읽는 대통령을 무료하게 지켜보다가 넷플릭스에 접속했는데 1시간40분에 이르는 러닝타임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습니다. 삼일절이 안긴 뜻밖의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흡인력이 대단한 수작이었습니다.
‘Ukraine’s Fight for Freedom, 2015’라는 부제가 붙은 이 다큐멘터리는 우크라이나의 이른바 ‘오렌지 혁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2004년의 1차 혁명 뒤를 이은 2013~2014년 2차 혁명 얘기입니다. 당시 우크라이나인들은 친러 정책을 펴는 야누코비치 대통령에게 EU 가입 등을 요구하면서 거리로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는 대통령이 러시아로 도망갈 때까지 무려 90일이 넘는 투쟁을 펼칩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지금 우크라이나인들이 왜 목숨을 걸고 러시아와 싸우는지를 명료하게 이해시킵니다. 그들에게 서방은 ‘자유’이고 러시아는 ‘억압’입니다. 이미 민주주의의 맛을 본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야누코비치 독재 정권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화면 곳곳에서 시위대들은 자신들이 싸우는 이유를 분명하게 얘기합니다. “자유는 우리의 몫이자 권리입니다” “유럽과 자유세계의 일원이 될 겁니다” “노예가 될 일은 절대 없고 자유를 만끽할 겁니다”….
카메라는 이들이 요구하는 자유의 대가를 냉정하게 응시합니다. 화면 속 철봉을 든 무장경찰은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구타합니다. 눈이 빠지고 뇌수가 흐를 정도의 사상자들이 속출합니다. 수치심을 안기기 위해 한 남성 시위자를 발가벗겨 경찰차에 태우는 장면도 등장합니다. 전쟁과도 같은 도심 공방전에서 밀리면서 경찰은 실탄 사격을 가합니다. 저격수들의 총탄에 쓰러진 동료를 둘러업고 뛰는 사람들에게도 총탄이 날아옵니다. 순박했던 거리의 청년이 총을 맞고 숨지자 그의 얼굴은 시위대의 방패에 수호신처럼 새겨집니다. 관을 둘러메고 의사당으로 향하는 시위대들은 정부와의 협상안을 제시하는 야당 지도자들을 향해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고 절규합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의 투쟁을 지켜보면서 기시감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들보다 30년 앞서 이 땅에서도 최루탄 자욱하던 거리에서 목숨을 내던진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보편적 가치이면서 거기에 이르는 과정 역시 보편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압축된 역사든 뭐든 자유의 쟁취에는 일정한 희생이 따른다는 자각이 들었습니다. 새삼스러운 제 자각을 비추는 오래된 명구들은 넘쳐납니다. 미국 독립운동을 이끈 토머스 제퍼슨은 “자유의 나무는 때때로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로 생기를 되찾는다(The tree of liberty must be refreshed from time to time with the blood of patriots and tyrants)”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주주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국의 독재자와 싸우던 그들 앞에는 푸틴이라는 민주주의의 더 큰 적이 나타났습니다. 다큐멘터리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은 “우리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싸운다”는 말을 되풀이합니다. 아이들의 자유와 생존이 걸린 투쟁 앞에서 독재자가 전쟁의 명분으로 내건 괴상한 민족주의는 너무나 초라해 보입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의 투쟁에 응원을 보냅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