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인 된 니콜라스 케이지? 할리우드 기인들이 몰려온다
입력 2022.02.27 11:54
미국 시상식 시즌에 맞춰 개성 강한 명감독의 신작이 극장가를 찾아온다. 그중 지난 23일 나란히 개봉한 영화 ‘나이트메어 앨리’‘시라노’‘피그’는 독특한 캐릭터 열전이 눈길을 끈다. 차례로 ‘나쁜 놈, 착한 놈, 이상한 놈’에 빗댈 만하다. 낯선 삶에서 의미를 짚어낸 스타들의 연기 대결이 볼거리다.
매혹적인 악인들의 향연 ‘나이트메어 앨리’
먼저, ‘나이트메어 앨리’는 할리우드 공포 거장 기예르모 델 토로(‘판의 미로’ ‘헬보이’)의 악몽 같은 상상력이 생생한 영화다. 물고기 인간과 청소부 여인의 애절한 러브스토리로 2018년 아카데미 작품상 등 4관왕을 차지한 전작 ‘셰이프 오브 워터’의 낭만은 잊어라. 이번엔 괴물보다 더 추악한 인간들의 비뚤어진 초상을 그렸다. 다음 달 27일(미국 시간)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촬영‧의상‧프로덕션디자인 등 4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주인공은 수려한 외모의 빈털터리 청년 스탠턴(브래들리 쿠퍼). 유랑극단에서 독심술을 익힌 그는 은밀히 가까워진 심리학자 릴리스(케이트 블란쳇) 박사의 도움으로 뉴욕 최상류층 거물들에게 사기 행각을 벌인다. 유랑극단에서 데려온 연인 몰리(루니 마라)마저 위험에 빠트린다.
델 토로 감독이 30년간 영화화를 별렀다는 1946년 동명 소설이 토대다. 술 냄새와 신비주의가 판을 쳤던 194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를 무대로 죄의식 없는 욕망의 여정을 펼친다. 내내 눈‧비로 질척대는 비정한 밤 풍경은 당대 할리우드에서 인기 끌던 필름 누아르를 연상시킨다.
“당신이 속이는 게 아냐. 사람들이 스스로 속는 거지.” 릴리스는 달콤한 독약 같은 말로 스탠턴을 현혹한다(블란쳇이 넷플릭스 영화 ‘돈 룩 업’ 못지않은 유혹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돈에 눈먼 스탠턴의 오만방자함도 비호감이긴 마찬가지다. 차라리 그가 떠나온 유랑극단의 소박한 기인들이 더 인간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럼에도 스탠턴을 끝까지 지켜보게 되는 건 브래들리 쿠퍼의 열연 덕분이다. 병맛 코미디(‘행오버’)부터 지질함과 광기를 오가는 연기(‘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리미트리스’)까지 연기폭을 넓혀온 그다. 원래 스탠턴 역에 내정됐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하차한 후 출연 제안을 받자마자 제작까지 겸해 합류했다. 쿠퍼는 촬영 중에도 스탠턴의 극과 극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약 7㎏까지 체중 감량했단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수십번 촬영도 각오했다는 영화 후반 “진실하고도 잔혹한 순간”의 장면 역시 그는 단 한 테이크 만에 완벽히 연기해냈다. 이미 공허한 괴물이 된 스탠턴의 미친듯한 웃음이 뇌리에 남는 명장면이다.
그림자 사랑꾼의 세레나데 ‘시라노’
조 라이트 감독(‘어톤먼트’ ‘안나 카레리나’)의 ‘시라노’는 17세기 프랑스를 무대로 엇갈린 사랑을 아름다운 노랫말로 감싸 안는 뮤지컬 영화다. 대사 하나하나가 시다. 원작은 프랑스 동명 실존 시인이자 검객의 삶을 토대로 한 희곡 ‘시라노 드 베주라크’. 지나치게 큰 코 탓에 짝사랑하는 여인에게 고백 못 한 채 연적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준 비운의 남자 이야기다. 이를 TV 시리즈 ‘왕좌의 게임’ 등으로 낯익은 왜소증 배우 피터 딘클리지가 주연을 맡아 새롭게 해석했다.
영화 속 시라노는 키 132㎝의 작은 체구지만 장정 10명쯤은 거뜬히 해치우는 전쟁 영웅. 어릴 적부터 짝사랑해온 록산(헤일리 베넷) 곁을 맴돌던 그는 록산과 사랑에 빠진 신입 병사의 세레나데까지 대신 지어주는 신세가 된다. 미국 인디밴드 ‘더 내셔널’이 현대적 감각으로 새로 쓴 록감성 음악들이 고전 시대극에 아름답게 녹아든다. 배우들의 가창력도 빼어나다. 특히 “난 멀리서 사랑해야 할 운명”이라 노래하는 딘클리지의 호소력 짙은 중저음은 이 영화의 발견이다.
이 영화는 각본을 맡은 에리카 슈미트의 동명 뮤지컬이 토대다. 원작 희곡을 무대에 올릴 때마다 잘생긴 배우가 가짜 코를 달고 나와 연기한 터. 보다 진실한 것을 고민하던 슈미트에게, 남편인 딘클리지가 한번 읽어보겠다며 대사를 읊은 순간 새로운 시라노가 탄생했다. 딘클리지는 뮤지컬에 이어 영화 주연까지 꿰찼다. 그의 공연에 감명받은 라이트 감독이 스크린에 옮겨낸 영화는 올해 아카데미 의상상 후보에 올랐다.
자연인 니콜라스 케이지의 부활 ‘피그’
‘피그’는 수염이 덥수룩한 니콜라스 케이지의 폐인 같은 모습부터 충격적인 영화다. 외딴 숲에서 돼지와 단둘이 송로버섯을 채취하며 살아가던 ‘롭’이 어느 날 괴한이 훔쳐간 돼지를 찾아 나선 얘기다. 15년 전 떠나온 도시로 돌아간 롭의 여정엔 그가 과거에 묻어온 인연들과 상처가 봇물 터지듯 흘러나온다.
40년간 100편 가까운 작품에 출연했으나 최근 슬럼프에 빠졌던 케이지가 초심으로 돌아간 듯한 연기가 화제다. 라스베가스‧시애틀‧샌디에이고 비평가협회 남우주연상 등 미국 시상식 시즌 연기상 13관왕에 올랐다. 비평 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선 역대 출연작 최고 신선도(97%)를 받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올해의 영화’로 추천하기도 했다. 초기 출세작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 못지않은 전환점이 될 작품으로 회자된다.
“이름, 꿈, 인생… 어느 것도 진짜가 아니야”란 대사 속엔 할리우드 스타로서 케이지의 지난날도 겹쳐진다. 버라이어티와 인터뷰에서 그는 “몇번의 흥행 실패 이후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저를 외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며 연기를 포기할 생각이 들 때마다 꾸준히 하다 보면 다시 발견해줄 것이라 되뇌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영화의 각본‧연출을 겸해 극영화 데뷔한 신예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이 ‘대배우’라 여겨온 그에게 직접 출연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