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개츠비는 어디서 태어난 걸까?[생생유통]
2030세대 명품 매출 절반 차지 성장세 주도
유튜브에서는 명품 하울, 언박싱 영상 인기
프리지아, 우리 사회 명품 현상 단면 보여줘
명품 종이 쇼핑백은 온라인 중고거래되기도
꿈 이루기 힘든 사회에서 일시적인 만족감
- 입력 : 2022.02.19 18:01
[생생유통] "뭐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돈은 많은 수수께끼의 젊은 사람들. 한국에는 개츠비들이 너무 많아."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에서 종수(유아인)는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부유한 벤(스티븐 연)을 보며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 속 부유한 주인공 개츠비를 떠올린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소설가 지망생 종수는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일용직으로 살아간다.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하며 사회적 약자다.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벤은 돈이 많다. 여유롭게 여행을 다니며 포르쉐를 몰고 좋은 빌라에 산다. 집에는 매력적이지만 새롭고 쓸모없는 것을 잔뜩 모아 놓고 있으며 '그냥 노는 게 일'이라고 말한다. 종수로 대표할 수 있는 평범 내지는 가난한 청년들에게 벤으로 대표되는 부는 의뭉스러운 존재다.
코로나19 터널을 지나오면서 한국에는 수많은 개츠비가 탄생한 것처럼 보인다. 경기 침체 속에서도 백화점 명품 매출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롯데백화점에서 명품 매출은 지난해 32.8% 성장했다. 신세계백화점과 현대백화점에서도 명품 매출은 각각 44.9%, 38% 늘었다. 백화점 명품 매출 성장의 일등공신은 2030세대였다. 명품 매출에서 2030세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롯데백화점 45.4%, 신세계백화점 50.5%, 현대백화점 48.7%를 기록했다. 명품 매출만 본다면 뭐 하는지 모르겠는데 돈은 많은 수수께끼의 젊은 사람들, 개츠비들이 정말 늘어난 것 같다.
보통의 사회적 상식으로는 금수저가 아닌 이상 2030세대가 부유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나 요즘 같은 취업난 속에서는 더욱 어렵다. 2021년 12월 기준 15~29세 청년확장실업률은 19.6%로 조사됐다. 또한 2020년 한 취업 정보 사이트의 조사에 따르면 신입사원 평균 연령이 31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만 본다면 많은 수의 20대는 모을 돈도 없다. 30대는 되어야 돈을 모으기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숫자를 단순히 해석하자면 우리나라 청춘들은 가난하다. 하지만 2030세대가 명품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국세청이 공개한 자료에서 2020년 증여세 관련 신고 건수는 21만4603건으로 전년(15만1399건) 대비 41.7% 늘었고, 재산가액은 43조6134억원으로 전년(28조2502억원) 대비 54.4% 증가했다는 점에서 금수저가 늘어서 많이 팔린 것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금수저 증가만으로는 유튜브에서 10대와 20대 초반 인플루언서들이 올린 '명품 하울(구매한 물건을 품평하는 영상)' '명품 언박싱(구매한 상품을 개봉하는 영상)' 등이 높은 조회 수로 인기를 끄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개츠비의 천국이다. 명품백, 멋진 호텔에서의 호캉스, 비싼 자동차 등을 쉽게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부러워하고 추종한다. 인플루언서 '프리지아'는 그런 개츠비 중에서 올해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그리고 극적인 스토리를 보여준 인물일 것이다. 지난해 12월 넷플릭스를 통해 '솔로지옥'이 공개된 이후 50만명였던 프리지아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공개된 지 2주도 지나지 않아 100만명을 넘기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부유하고 수많은 명품을 착용하는 프리지아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짝퉁 착용 논란으로 무수한 비난과 함께 프리지아는 곧이어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대중을 기만한 '괘씸죄'가 무엇보다 큰 이유였지만 한편으로 더 이상 금수저가 아니라는 점이 비난의 한 요인이 됐다.
명품을 구매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부의 상징이라는 기호적 가치일 것이다. 물론 명품은 제품으로서 튼튼하며 아름다운 디자인에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리셀하기 위한 재테크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이 경우 베블런 효과나 스놉 효과, 파노블리 효과 등과 같은 사치재 소비에 대한 이론은 맞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명품 매장에서 공짜로 주는 종이 쇼핑백을 당근마켓 등 중고거래를 통해 5만원이나 주고 구매하는 사람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사치재 소비에 대한 경제학 이론이 여전히 유효함이 손쉽게 증명된다. 명품은 부를 가장 손쉽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다. 장 보드리야르, 피에르 부르디외 등은 기호로써 좋은 제품 이상의 명품을 설명했다. 그들의 이론은 SNS로 대표되는 온라인의 발달, 도시화라는 상황에서 더 명확하게 적용된다. 도시화로 만나야 하는 사람은 더 많아졌으며 익명화됐다.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우위를 보여줄 필요성은 커졌다. 온라인은 더 심각하다. 사진 한 장으로 자신이 지닌 우위와 소속된 집단을 나타내야 하는 상황에서 명품은 확실한 도구다.
우리 시대의 청춘에게는 그다지 자랑할 게 없어 보인다. 돈이 없으면 꿈이라도 자랑해야 하는데 꿈꿔봤자 세상이 도와주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돈이 없다면 멋있게 살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성공해서 부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건 거의 불가능이다. 어차피 돈 모아서 부자가 되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있는 돈 털어 명품을 사서 부자가 된 척을 하거나 그런 것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특히나 SNS라면 명품으로도 충분히 '있는 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30세대는 척으로 사회적 권위를 얻을 수 있다면, 혹은 부유한 조직에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면 그 만족감만으로 충분하다.
'위대한 개츠비 곡선'이라는 게 있다. 경제 불평등이 클수록 세대 간 계층 이동성이 낮아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곡선이다. 당연히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가난하게 태어나 큰 부자가 되는 주인공 개츠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미국인들은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고 개츠비처럼 개천에서 용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국가 간 비교 연구를 해보니 미국을 비롯해 소득 불평등이 심화된 나라일수록 교육·연줄·상속 등으로 자식 세대의 역전 기회가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위대한 개츠비 곡선을 처음 언급한 앨런 크루거 전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이 현상에 '위대한 개츠비'라는 이름을 붙여 불평등의 심각성에 대한 관심을 유도했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은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의 상식이 되어버렸다. 위대한 개츠비 곡선 위에 있는 2030세대는 SNS에서라도 개츠비가 되기 위한 노력으로 명품을 사거나 개츠비를 동경한다. 또는 개츠비가 될 수 없음에 철저한 외면 속에서 살아간다.
영화 '버닝'의 마지막에서 종수는 벤을 칼로 찔러 죽인다. 이후 벤의 포르쉐에 기름을 뿌리고 벤의 피가 묻은 자신의 옷들을 전부 벗어 같이 넣고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알몸이 된 종수는 유유히 현장을 빠져 나오며 영화는 끝난다. '버닝'이라는 영화는 다양한 의미와 기호를 담고 있다. 수많은 의미와 기호 사이에서 마지막을 어떻게 보는가는 순전히 관객의 몫이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확실한 것은 소설 속 개츠비가 총을 맞고 죽은 것처럼 종수가 개츠비라고 말했던 벤은 결국 살해당했다. 종수는 개츠비를 동경하기도 했지만 개츠비가 될 수도 없었다. 현실에서의 종수와 SNS 속 개츠비, 혹은 현실에서도 SNS에서도 그저 종수일 뿐인 사람들까지 그 사이에 관계가 누군가가 불 타야 끝나는 관계는 아니었으면 한다.
[강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