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신문기자’, 모치즈키의 질문이 쏘아 올린 언론 자유
정철운 기자
입력 2022.02.13 15:50
도쿄신문 기자는 어떻게 “일본 언론자유의 상징”이 되었나
“각본대로 기자회견이 무슨 의미있나” 기자클럽 공개 비판
넷플릭스 ‘신문기자’는 첫 회에서 ‘후퇴한 언론자유 일본은 72위, G7 중 최하위’란 제목의 신문기사를 의도적으로 보여준다. 실제 일본은 2016년 72위를 기록했다. 한때 10~20위권이었으나 아베의 장기집권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방사능 유출 사고 은폐를 계기로 순위가 크게 하락했다. 2021년은 67위였다. 일본 언론의 현실을 정면으로 드러낸 이 드라마는 넷플릭스의 제작투자가 아니었다면 등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극중 내각관방 고문 토요다 신지로는 총리에 비판적인 기자들을 가리켜 말한다. “그분들은 늘 폭력적입니다. 저널리스트라기보다 운동권에 가까운 사고방식을 가졌어요.” 토요다는 여론을 바꾸기 위해 내각정보조사실에 언론사 사장의 뒷조사를 지시한다. 민간인 사찰이다. 극 중 토토신문 기자 마츠다는 어렵게 입수한 공무원의 유서를 “일방적 주장”으로 일축하는 편집국장을 향해 “소리 없는 목소리를 전달하는 게 기자의 일”이라고 응수한다.
포기를 모르는 기자가 이윽고 국가범죄를 1면 톱으로 보도하는 순간은 시청자에게 적지 않은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우리는 공감을 통해 취재원의 신뢰를 끌어내는 기자의 소중함도 목격한다. “젊은 사람들은 신문을 안 읽는다”며 사회문제에 무관심했지만, 결국 신문기자의 길을 택하게 되는 극중 청년 기노시타 료에게서는 일본 사회의 ‘희망’을 본다.
“일본 언론자유의 상징”(뉴욕타임스)으로 불리게 된 모치즈키 이소코. 일본 넷플릭스 시청 1위를 기록한 ‘신문기자’의 실존 인물이다. 현직 기자를 주인공으로 한 이 드라마는 왜 흥행했을까. 2017년 발간한 그녀의 책 ‘신문기자’에는 일본 시민들이 모치즈키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담겨 있다.
모치즈키는 1975년 도쿄 출생으로 게이오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호주 유학까지 마친 ‘엘리트’다. 어렸을 때는 배우가 꿈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도 기자였다. 남들처럼 여러 신문사에 지원하다 2000년 도쿄신문에 입사했다. 도쿄신문은 일본 내에서 아사히신문보다 진보적으로 분류된다. 이곳은 수습기자들에게 직접 신문 배달을 시켰다.
“신입 시절에는 무조건 특종만 노렸다.” 사건 관계자를 밤이고 낮이고 기습 취재했고, 취재원과 친해지기 위해 매일 취재원과 조깅을 하기도 했다. 사회부에서 두각을 보였고, 요미우리신문과 아사히신문에서 이직 제의를 받았지만 가지 않았다. 그리고 입사 4년차에 고대하던 도쿄지검 특수부를 출입하게 됐다. 하지만 특종 욕심에 조급하게 썼던 단독 기사는 형사고소로 이어졌고, 취재원이었던 도쿄지검 특수부 조사를 받았다. 이후 편집부 생활을 했다. 요미우리신문이 또 이직을 권유했지만 “요미우리만은 정말 싫다”는 아버지 말을 들었다.
몇 년 뒤 다시 사회부로 돌아가 동료 기자와 결혼 하고, 2011년 딸을 낳았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방사능 유출 사고를 취재하는 대신 1년간 육아휴직을 했다. 복귀 후 경제부 시절엔 육아 때문에 심야-새벽 취재가 불가능해졌다. 둘째 출산으로 두 번째 육아휴직을 마친 뒤 2014년 방위청을 취재하며 정부와 날을 세웠지만 취재가 쉽지 않았다.
2017년 2월9일, ‘학교법인에 오사카 국유지 매각 가격은 비공표, 인근 지가의 10%?’ 아사히신문 단독보도가 등장하며 모리토모 스캔들이 시작됐다. 아베 총리가 자신의 측근이 운영하는 모리토모 학원에 국유지를 헐값에 넘겨주는 특혜를 주려 했고, 이를 위해 재무성 공무원들이 공문서를 직접 조작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문서 조작에 나섰던 공무원이 극단적 선택을 했고, 아베는 “아내 또는 내가 연루되었을 경우 자리를 내놓겠다”고 말했다.
“나는 부정 사건 취재를 너무나도 좋아했다.” 모치즈키의 취재가 시작됐다. 모리토모 학원에 국유지가 매각되던 당시 재무성 이재국장(기획재정부 격 중앙행정기관의 재정투자‧국유재산 관리 담당)이었던 사코타 히데노리 국세청장이 핵심인물이었다. 취재 도중 어머니가 암으로 사망했지만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 스캔들 배후에 총리 관저가 있음을 알고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정부 대변인)의 정례회견에 집중했다. 정부 공식 입장이 나오는 유일한 통로였다.
과거 정례회견 영상을 찾아보니 10분이면 끝이 났다. “도쿄신문, 모치즈키입니다.” 처음 참여한 정례회견에서 혼자 10분 이상 질문했다.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되풀이해서 묻고 있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도쿄신문입니다.” 그렇게 2017년 6월8일 정례회견에선 혼자서 40분간 무려 23번 질문했다. 이날 스가 장관은 오프더레코드 취재에 응하지 않고 떠나버렸다.
기자클럽은 모치즈키로 인해 오프더레코드 취재가 없어질지 모른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기자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정권과 가까웠다.” 하지만 TV아사히가 그날의 회견장 모습을 보도하며 모치즈키는 유명세를 탔다. 일주일간 50부의 신규 구독 신청이 있었다. 격려 전화가 오고 또 왔다. “이렇게까지 많은 응원을 받는 것은 기자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응원은 뒤집어 생각하면 평소 국민이 언론사에 갖는 불신의 방증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걸 아무도 물어봐 주지 않잖아.’ 기자가 권력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사실 칭찬받을 일도 아니다. 이제는 언론이 권력자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구나. 저널리즘이라는 근사한 말 뒤로 그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모치즈키가 질문을 멈출 수 없는 이유였다.
관저 회견 분위기는 여전히 냉랭했지만, 모치즈키는 굴하지 않았다. “힘들고 괴로웠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질문뿐이라고 마음을 다잡으며 매일 관저 회견에 참석했다. … 다른 기자들도 회견장에서 질문해주기를 바랐지만, 나는 여전히 겉돌고 있었다. 관저 기자들은 나와 눈조차 맞추지 않았다. … 한번은 제대로 된 답변을 얻지 못해 공보관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손을 들자, 내각기자회 간사를 맡은 기자가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라며 제멋대로 회견을 끝내버렸다. 공보관도 아니고 왜 같은 기자가 기자의 질문을 무시하는 거지? 기자클럽 제도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고, 그날은 너무도 우울했다.” 기자가 기자의 취재를 제한하는 상황은 기자단이 있는 한국에서도 쉽게 사례를 찾을 수 있어 새삼 놀랍진 않다.
스가 관방장관은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는 않았어도 손을 든 기자는 반드시 지명해줬다. 하지만 어느 순간 회견 시간이 줄고, ‘질문 하나만 더 받겠습니다’라며 마지막 질문을 지정하기 시작했다. 기자클럽은 이 같은 변화에 대체로 ‘순응’했다. 모치즈키는 기자클럽 제도의 한계를 명확히 느끼게 된다. 이런 가운데 산케이신문 관저 담당 기자는 “도쿄신문 사회부 기자가 야당 의원처럼 되풀이하는 질문 때문에 관방장관 회견이 엉망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모치즈키는 “무슨 생각으로 기자 일을 하고 있는거냐고 따지고 싶었다”고 했다.
모치즈키는 아베 총리에게도 질문하려 했지만 기자회견에서 그녀의 이름이 불린 적은 없었다. “(총리 회견에서) 사회자에게 지명되는 곳은 NHK, 니혼TV, TBS, 요미우리신문, 산케이신문 등 한정된 매체의 기자들뿐이다. 그중에는 손을 들지 않았는데도 지명받은 NHK기자도 있었다고 한다. … 사전 제출된 질문에 맞춰 작성한 답변을 아베가 자신의 의견인 양 낭독하는 식이다. 그런 기자회견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각본 있는 기자회견. 불과 몇 년 전 한국에서도 대통령과 청와대 기자들 사이 벌어졌던 일이다.
내각정보조사실이 모치즈키를 주시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질문들이 쌓여 큰 소리가 되고, 언젠가는 정권을 뒤흔들 거라고 믿으면서 매일 총리 관저로 향하고 있다. 나는 특별한 일을 하는 게 아니다. … 감식반 형사가 해주었던 ‘정보를 이야기할 건지 말 건지는 기자가 얼마만큼 열정을 가졌는지에 달렸어’라는 말을 되새기며 취재에 임해왔다. … 감추려고 하는 것을 찾아내서 세상에 밝히는 것. 기자로서 나의 과제다.” 진실을 향한 집요한 의지가 갖는 희망, 정부여당의 언론 탄압에 대한 누적된 사회적 불만이야말로 모치즈키를 향한 성원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