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살해 당하는 남자, 이 장면이 보여준 미국의 현실
페리(자리아)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제이스(조이 배드애스)는 집에 남겨 두고 온 반려견 지터가 눈에 밟힌다. 반려견에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페리의 집을 나선 그는 음악을 들으며 여유롭게 담배 한 대를 입에 문다. 제이스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때마침 커피를 손에 들고 그의 곁을 지나던 한 남성. 그와 부딪히는 제이스. 이 충격으로 인해 남성의 상의가 더럽혀진다. 곧바로 사과하는 제이스.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뉴욕 경찰서 소속 경관 메르크(앤드류 하워드)는 무슨 일이냐며 제이스에게 접근해온다. 두 사람은 담배와 관련하여 몇 마디를 주고 받는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런데 급작스레 태도가 돌변하는 메르크, 제이스의 소지품과 신상을 조사하겠다며 그를 거칠게 몰아붙인다. 무기를 소지하지도 않았고,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지도 않았음에도 제이스는 여러 명의 경관에 의해 제압을 당한 채 차디찬 시멘트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다. 목과 얼굴이 짓눌려 "숨을 쉴 수 없어요"라고 절규하는 제이스. 그러나 그의 외침도, 주변 상인의 만류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제이스는 그렇게 죽어갔다.
영화 <낯설고 먼>은 매일 죽음을 반복해야 하는 한 흑인 남성에 대한 이야기다.매일 반복되는 무한 루프의 늪 속에서 어떠한 묘수도 결국 죽음을 피해갈 수 없게 하는 한 남성의 이야기를 통해 유색인종을 향한 혐오와 차별에 신음하는 미국 사회의 현실을 비튼다.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단편영화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 영화 <낯설고 먼> ⓒ 넷플릭스
다음날 아침 다시 페리의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제이스. 그의 곁에는 페리도 있었고, 신기하게도 전날 겪었던 일과 똑같은 상황이 재현되고 있었다. 반려견 지터에 밥을 주기 위해 밖으로 나선 제이스는 그래서 살짝 꾀를 부려본다. 어제와는 달리 루틴에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르크 경관을 피해갈 수 없었고 결국 그에 의해 또 다시 목숨을 잃게 된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 어떻게 해야 죽음을 피해갈 것인지 제이스의 고민은 깊어진다.
영화는 제이스라는 흑인 남성을 하루가 반복되는 무한 루프에 가둬놓은 채 끊임 없이 그를 죽인다. 제이스는 안타깝게도 그 틀 안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고, 사건의 예측 방향에 따라 이를 사전에 대비해도 죽음만큼은 결코 피해갈 수 없다. 단 하루만 살고 매일 생을 마감해야 하는 제이스. 무한 루프의 세상 안에는 영화 등의 미디어 매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행우주나 멀티버스 따위는 일절 없다. 오로지 쳇바퀴 돌 듯이 그 안에서 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늘 경관에 의해 끔찍한 죽임을 당한다.
영화는 미국 사회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공권력 남용을 무한 루프처럼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가면서 절대로 죽음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는 한 남성의 끔찍한 현실에 빗댄다. 미국 사회의 유색인종을 향한 혐오와 차별은 그만큼 뿌리가 깊고 단기간에 해소될 사안이 아님을 극에 고스란히 반영시킨 셈이다. 제이스가 경관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숨을 쉴 수 없다"고 내뱉던 단발마는, 지난 2020년 5월 미국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경관에 의해 무릎으로 목이 눌려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가 내뱉던 절규에 다름 아니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은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공권력 남용을 규탄하는 시위를 미 전역에 확산시키는 도화선이 되었으며, 흑인 인권 운동인 'Black Lives Matter(블랙 라이브스 매터, BLM)'의 조직화를 더욱 촉발시켰다. 극 중 제이스는 매일 이유 없는 죽임을 당한다. 이 끔찍한 무한 루프의 사슬을 어떻게든 끊겠다고 단언하는 제이스. 그의 단언처럼 세상은 조금이라도 변화하고 있을까.
지난해 3월, 미 하원은 용의자 목 조르기를 금지하고 경찰의 면책 특권을 제한하는 내용의 법안을 가결시켰다. 법무부도 이에 화답했다. 지난해 9월, 법 집행요원이 용의자 제압 시 목 조르기, 사전 고지 없는 강제 진입 등의 수단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연방수사국(FBI), 마약단속국(DEA), 연방보안관실 등 법무부 산하 기관에 관련 지침을 내렸다.
조지 플로이드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희생 덕분에 미약하나마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 단편 영화 <낯설고 먼>이 엄혹한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는 간결하고도 명확하다. 차별과 혐오, 억압 없는 세상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