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정복자의 시대에서 관찰자의 시대로... ‘돈룩업’과 ‘문어 선생’의 특이점에 부쳐
넷플릭스 영화 ‘돈룩업’과 ‘나의 문어 선생님’을 시간차를 두고 보았다. 저 높이 우주의 별을 올려다보는 ‘룩업(Look up)’과 저 아래 대서양의 미역 숲을 누비며 문어를 들여다보는 ‘룩다운(Look down)’은 극과 극의 높낮이로 시야의 조망을 터주었다.
‘돈룩업’은 블랙 코미디다. 혜성 충돌로 지구 종말이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과학자의 경고조차, ‘개그’와 ‘정쟁’으로 치고받는 소셜미디어 시대의 풍경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뉴스 미디어가 대중의 주의집중력을 스낵처럼 조각내는 가운데, 과학자는 왕따당하고, 정치인은 사기 치며, 예술가는 저항하고, 대중은 패를 갈라 싸운다.
마침내 에베레스트산 만한 거대한 혜성이 날아드는 순간조차, 사람들은 ‘하던 대로’ 종말을 맞는다. 뉴스쇼 사회자는 술 취하고 대통령은 도망치고 사업가는 벌거벗고 과학자는 기도하며. 진정성은 ‘밈’으로 소비되고, 팩트는 이념으로 쪼개지는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의 왕국을 지켜보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가 마지막까지 정복할 수 없는 질병은 암이나 전염병이 아니라 ‘주의력 결핍 장애’가 아닐까. 아동부터 성인까지, 미디어 기업이 유포한 이 현대판 불치병 치료의 희망은 요원한 걸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이라는 책을 쓴 미국의 예술가 제니 오델은 소셜미디어가 착취한 주의집중력을 회수하기 위해, 우리가 바깥 세계로 걸어 나와 자기만의 ‘피지컬’로 환경을 감각할 것을 권했다. 그 자신, 친구에게 선물 받은 루페(확대경)와 망원경을 들고 다니며, 새를 관찰하고 정원을 산책하고 일기를 썼다.
‘야생동물인 까마귀가 나를 알아본다는 것… 가끔은 저 멀리 나무 위의 까마귀들에게 손을 흔들어줄 수도 있다는 것은 나 자신의 동물성과 내가 사는 세계의 활기를 상기시켜주었다… 나는 아바타가 아니고, 취향의 조합도 아니고, 매끈한 인지적 작용도 아니다… 나는 동물이다. 가끔 다치고 하루하루 달라진다’라고 제니 오델은 기록하고 있다.
감각이 마비되는 초연결 시대일수록, ‘관찰과 기록’은 자기 결정권을 회복하는 믿을만한 재활 처방으로 보였다.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님’에서 다이버이자 감독인 피파 에를리히는 아프리카 끝 바다 숲에서 만난 한 마리 암컷 문어를 1년 동안 관찰한다. ‘내가 저 문어에게 배울 게 있겠구나’라는 고백과 함께 그들의 동행은 시작된다.
어느 날, 경계를 푼 문어가 촉수 달린 기다란 발을 뻗어 인간의 가슴을 두드릴 때, 상어에게 잘린 다리 사이로 슬픈 눈을 껌뻑일 때, 온몸의 에너지를 끌어모아 알을 품고 죽어갈 때, 한 바다 생물을 지켜보는 인간의 ‘리스펙’은 종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어쩌면 관찰은 속절없이 흘러가는 이 세계에서, 유한한 단독자인 내가 대상을 이해하려고 택한 가장 정중한 방법이 아닐는지.
글을 쓸 때도 사랑을 할 때도 아이를 키우거나 사업을 시작할 때도, 대상을 알고 이해하려면 반드시 얼마의 시간 동안은 가만히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 가만히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자세를 낮추고 지루함을 견뎌야 비로소 보인다. 생물과 사물이 지닌 그들만의 무질서와 혼돈이, 질서와 아름다움이.
관찰의 핵심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는 것이다. ‘타자의 자리’를 지켜주고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과학자와 예술가들은 ‘가만히 바라보기’가 최적화된 사람들이다. 동물학자 최재천은 지구에서 가장 하찮게 취급되는 민벌레를 관찰해서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문득 세계적인 석학 제래드 다이아몬드를 인터뷰할 때가 생각난다. ‘누가 당신에게 지적 자극을 주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스티븐 핑커? 유발 하라리?” 빙그레 웃으며 그가 말했다. “나는 LA 협곡의 새에게 더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는 뉴기니에서 새를 관찰하던 비교방법론을 사용해 그 유명한 ‘총균쇠’를 썼다.
‘얼마나 정중하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관찰의 창조성은 깊어진다. 에세이스트 김소영은 독서 교실에서 만난 아이들을 관찰해서 한 명 한 명을 정확하게 그렸다. 그의 책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아이들은 다 다르게 웃기고 생생하고 사려 깊다. 흑설탕을 흙설탕으로 착각해서 한사코 사양하는 아이, “서로 몸이 달라도 ( )하자”의 괄호 안에 ‘반겨 주자’ ‘같이 놀자’를 써넣는 믿음직한 어린 활동가들을 보고 있노라면 주변 세계를 향한 그 순한 마음에 미소가 절로 난다.
야망 있는 예술가들은 스스로를 맹렬하게 관찰하기도 한다. 가수 장기하는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고 싶어서 나를 관찰했고, 못하는 것을 하나둘 포기했더니 지금의 선명한 내가 남았다”고 했다.
내가 하는 인터뷰 또한 관찰과 기록의 깊은 여정이다. 현장에서 섣불리 개입하지 않고 ‘더 많이 기다려줄수록’ 인터뷰이는 더 똑똑해지고 더 아름다워지고 더 자신만만해진다. 인터뷰이들의 말과 표정이 ‘나’라는 백지에 번져오도록, 나는 매번 더 깨끗한 감광지가 될 뿐.
관찰을 시작하면 나도 남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제 각자의 서식지에서 서사를 만들어가는 생생한 존재로 감각되기 때문이다.
다정한 눈은 겹눈의 감각으로 더 많은 풍경을 보고, 다정한 시력은 창조의 핵심이 된다. 본다. 그렇게 세상은 점점 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이동한다.
인류는 다른 생물의 서식지를 무리하게 침범해서 코로나 시대를 맞았다. 이제 힘과 기술로 제압하던 정복자의 시대는 지나갔다. 오직 관찰을 통해 타인을, 다른 종의 생물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인지할 때, 우리는 ‘세계화’의 환각에서 깨어나 감각화된 세계를 살 수 있다.
무엇보다 ‘관종을 위한 나라’에선 혜성을 혜성이라 부르지 못하지만(’돈룩업’), ‘관찰자들의 세계’에선 문어도 선생님으로(’나의 문어 선생님’) 호명한다. 알면 알수록 무신경하게 먹을 수 없는 것들은 더 많아질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