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복사하고 붙이기가 힘들어 3개로 나눕니다. <숲속의새>>
“이정재 뒷모습 보라, 승자 모습 보이던가? 진짜 1등은 말이야…”
‘오징어 게임’ 깐부 할아버지 오영수 인터뷰
모자와 안경, 마스크를 쓰고 인터뷰 장소인 경기 성남 위례신도시 자택 앞 놀이터로 휘적휘적 걸어 오는 배우 오영수(77)는 그저 평범한 동네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가 마스크를 벗자마자 지나가던 주민들이 모여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휴대폰을 꺼내 얼굴을 확대해 보며 ‘맞아, 맞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짧은 백발에 약간 기른 수염, 홍조 띤 얼굴까지 ‘오징어 게임’의 오일남 그대로였다.
“아이고, 동네 사람들 다 구경 났네!” 사진 촬영을 위해 미끄럼틀에 기대 앉은 노배우가 밝게 웃었다. “아 글쎄 며칠 전엔 근처 커피숍에 갔었는데, 커피를 마시려고 잠깐 마스크를 벗었더니 통유리 밖에 있던 젊은 사람들이 절 알아보고 ‘깐부 할아버지다!’ 하더니 몰려 들어와 사인을 해 달라고 조르더라고요. 배우 인생 54년 동안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드라마보다 20년은 젊게 들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평소 목소리가 연기할 때와 많이 다르다는 그는 요즘 들어 갑자기 신경쓸 게 많아 체중이 2㎏이나 빠졌다고 했다.
국내에서도 일반인에겐 낯선 얼굴이었던 오영수는 꼭 4주 전 갑자기 ‘월드 스타’가 됐다. 지난달 17일 공개돼 세계 넷플릭스 역대 최대 흥행작에 올라선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게임의 1번 참가자 ‘오일남’ 역을 맡은 것이다. 그가 ‘우린 깐부(딱지나 구슬을 서로 나누는 짝꿍이라는 뜻의 은어)잖아~’라는 명대사와 함께 퇴장하며 긴 여운을 남긴 6화에 대해 포브스지(誌)는 ‘올해 본 TV 에피소드 중 최고’라고 했고, 각국 유튜버들은 이 장면을 보고 울음을 펑펑 터뜨리는 리액션 영상을 앞다퉈 올렸다. ‘K-신파가 세계를 울렸다’는 말도 나왔다.
이쯤 해서 얘기하자면, 이제 스포일러(주요 내용 미리 공개)를 하지 않고 그의 인터뷰 기사를 쓰기는 불가능해졌다. 이 글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드라마 마지막 ‘게임의 설계자’라는 그의 정체가 밝혀지는 대목에서 세계 시청자들은 경악했다. “저 할아버지 누구냐” “신들린 연기” “배우가 아니라 진짜 오일남 같다” “드라마 성공의 1등 공신” “그 할아버지 때문에 계속 보게 됐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대중에게 얼굴이 널리 알려진 배우가 아니었기에 “금방 죽을 역할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드라마의 열쇠였다”는 반응이 국내에서도 나왔다. 이순재나 신구 같은 사람이 그 역할을 맡았다면 ‘저 할아버지한테는 뭔가 있다’고 의심했을 텐데 깜빡 속아넘어갔다는 얘기다. 그의 존재 자체가 ‘오징어 게임’의 거대한 스포일러인 탓인지, 넷플릭스 측에선 오영수에게 ‘처음 4주 동안은 언론 인터뷰를 자제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사실 오영수는 반세기 넘게 200여편의 연극 무대 위에서 활동한 한국 연극계의 대표적 원로 배우 중 한 사람이다. 연극계에서 그보다 연장자 중 지금도 무대에 오르는 배우는 이순재(87)와 신구(85), 권성덕(80), 이호재(80), 전무송(80), 박정자(79) 등 손으로 꼽을 정도다. 오영수의 출연작 ‘3월의 눈’(2018)을 함께 했던 연출가 손진책은 그에 대해 “오랜 세월 작품을 대하는 자세가 한결 같다”며 “순수함이 설득력 있는 연기로 승화돼 나오는 배우”라고 평가했다.
연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징어 게임’ 출연 제의를 받은 것이 언제였습니까?
“아르코예술극장에서 ‘노부인의 방문’(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작, 손정우 연출) 무대에 오르던 2019년 11월이었죠. 황동혁 감독은 예전에 제게 영화 ‘남한산성’(2017)에 출연해달라고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일정이 맞지 않아 못했었습니다. 훨씬 전에 김기덕 감독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에서 내가 노승으로 출연한 걸 기억하고 있었던 거예요. 감독이 대학로로 와서 일부러 연극을 보면서 저와 만났죠.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빚에 쫒기는 절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무인도에서 벌어지는 상금 456억원의 서바이벌 게임에 참가하는 이야기다. 게임 종목은 한국의 아이들 놀이인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뽑기’ ‘공기놀이’ ‘줄다리기’ 등인데 탈락자는 모두 주최측에 의해 살해당한다.
―대본을 읽고 나서 든 느낌은 어땠나요.
“뭐 그렇게 꼭 황당하지만은 않았어요. 아이들 놀이를 통해 처절한 경쟁 사회를 상징한 일종의 우화라고 읽혔기 때문이죠. 새로운 형식에 메시지도 강하고, 언어도 살아 있었어요.”
―오일남은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합니까?
“권력과 돈을 거머쥐었지만, 그러면서도 옛 추억을 잊지 못하는 인간적인 면모 역시 지닌 인물입니다. 자신이 정한 룰대로 승자에게 실제로 상금을 주고, 장기매매를 하며 게임의 ‘공정’을 위반한 부하를 처단하는 장면에서 보면 나름대로 원칙을 지키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선과 악이 모두 깃들어 있다는 점에서 언뜻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 보였고, 어쩌면 내 분신(分身) 같다는 기분도 들었어요.”
드라마 속 ‘001′ 번호가 새겨진 초록색 운동복을 입고 등장하는 오일남은 구부정한 자세로 팔을 휘저으며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게임을 즐기거나 도무지 상황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망연히 허공을 바라보다가도, 결정적인 장면에선 순식간에 부릅뜬 눈으로 상대방을 쏘아보며 얼어붙게 만들기도 한다.
―'저 배우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실제 상황을 겪는 것 같다’는 찬사가 쏟아집니다. 비결이라도 있나요?
“연기를 잘해야 한다고 욕심을 부리며 의식하지는 않았어요. 그저 ‘내가 극중 설정대로 약간 치매기가 있는 뇌종양 환자라면 어떻게 행동할까’ 생각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 사람의 캐릭터 안으로 들어갔던 거죠. 제가 오일남과 실제로 비슷한 연령대여서 망정이지 아마 10년 전만 해도 그런 연기가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이 배역에 필요한 내공이 아직 충분히 무르익지 못했을 겁니다. 내공이라는 것은 시간이 흘러 경륜이 쌓이기 전에는 좀처럼 생기지 않습니다.”
―10년 전이라 해도 67세였고 노승으로 많이 출연하던 때였는데, 내공이 무르익지 않았었다고요?
“제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가 배우 장민호(1924~2012) 선생입니다. 제가 환갑 넘어서 나름대로 연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때 술자리에서 ‘오영수! 네 연기는 가짜야, 넌 아직 멀었어’라고 버럭 꾸짖으시더라고요. 그때 ‘아이쿠, 정말 갈 길이 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설적인 배우 장민호의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는 사람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원빈의 노역을 떠올리면 된다. 서울역 뒤 국립극단에는 그와 또 다른 명배우 백성희(1925~2016)의 이름을 딴 ‘백성희장민호극장’이 있는데, 오영수는 “죽기 전 ‘장민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54년 동안 연극 무대 올라
그의 고향은 경기 파주다. 광복 전에는 임진강 너머인 경기 개풍군에서 태어나 살았는데, 거기서 고을 훈장을 하던 조부는 땅마지기도 꽤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38선이 그어지며 북한 땅이 돼 버리는 바람에 월남했다. 그나마 고향과 엎어지면 코 닿을 파주에 정착했다. 그래도 남부럽지 않은 집안 환경이었으나 6·25 때 부친이 공산군에게 살해당하고 형이 납북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그 뒤로 ‘흙수저 집안에서 젊은 날을 거칠게 살았다’고 한다. “검정고시도 보고 막노동도 하고 그랬죠. 여기저기 들락날락거리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쉰 넘어 받은 중앙대 예술대학원 수료증이 최종 학력이라고 했다.
―1967년 극단 광장에 들어가서 연기 인생을 시작했는데,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제대하고 나서 보니 학력이라 할 만한게 없었어요. 직장에 들어갈 여건이 되지 않아 친구 따라 극단에 갔던 건데, 아 참, 제가 소싯적엔 그래도 외모가 괜찮았던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연극 무대에 올라서니, 야 이것 정말, 전혀 몰랐던 새로운 세계가 보였습니다.”
―어떤 세계였나요.
“별 존재감 없던 젊은 내가 무대에선 의미 있고 함축된 언어를 토해냈어요. 그걸 본 많은 관객이 또 거기에 반응하며 웃고 우는 게 아니겠어요? 한마디로 황홀했죠. 그때부터 10년쯤 지나니 웬만한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는 세상이 되더라고요. 그래도 연극은 무대에서만큼은 항상 시대를 앞서 뭔가를 외치고 부르짖을 수 있었습니다.”
그 매력에 빠져 청소부터 포스터 붙이기, 연극이 끝난 후 뒷정리까지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며 연극에 몸담은 지 50년이 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연극이란 대체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시장에 장사하러 나가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의 젊은 날에서 ‘오징어 게임’ 주인공인 쌍문동 성기훈(이정재)의 모습이 비치는 셈이다.
‘대머리 여가수’ ‘따라지의 향연’처럼 한국 연극사에 빛나는 작품들로부터 ‘리처드 3세’ ‘베니스의 상인’ ‘리어왕’ 같은 셰익스피어 극이 그의 대표작이었다. ‘백양섬의 욕망’에서 안젤로 역으로 동아연극상(1980), ‘피고지고 피고지고’의 국전 역으로 백상예술대상 연기상(1994)을 받았다. 54년 동안 200편이 넘는 연극에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