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에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을 그린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 연일 화제를 모으고 있는 가운데 456명의 참가자 중 극히 비중이 적음에도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은 캐릭터가 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을 쓰는 남들과 달리, 상대를 살리기는 대신 스스로 탈락을 선택한 지영이다.
지영(이유미)은 ‘오징어 게임’ 4화 줄다리기 게임 직전 등장해 구슬치기 게임에서 새벽에게 패배하며 탈락한다. 게임을 앞두고 참가자들 사이 조가 나뉘며 모두가 승산이 있는 팀을 꾸리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때였다. 팀원을 찾던 새벽의 눈에 남들과 달리 의욕 없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지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조용하지만 강렬했다.
퇴장 역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풀어냈다. 네 번째 구슬 게임에서 일대일로 경쟁하게 된 지영과 새벽은 게임을 잠시 뒤로 하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과거를 털어놨다. 둘은 어느새 친구가 됐지만, 둘 중 한 명은 무조건 죽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구슬 하나로 승패가 갈리는 결정적인 순간, 지영은 스스로 패배를 선택했다.
그의 죽음은 게임의 잔인함을 상기시켰다. 구슬치기 게임은 규칙부터 잔인했다. 참가자들은 가장 친밀한 사람과 목숨을 건 승부를 벌여야 했고,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자기 손으로 상대를 죽였다는 죄책감이 남았다. 그 상황을 버티지 못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도 있었다. 지영의 죽음은 친구였던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야 하는 게임의 잔인함과 상금 456억이 누군가의 목숨값이라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처음부터 줄곧 무표정했던 새벽(정호연)은 처음으로 마음을 털어놓은 상대인 지영의 죽음에 강하게 동요했다. 그는 지영이 자신을 위해 패배를 선택하자 뭐 하는 짓이냐며 소리치고 화를 냈다. 하지만 “나갈 이유가 있는 사람이 나가는 게 맞잖아”라는 말에는 반박하지 못했다. 지켜야 할 것이 있어 게임을 그만둘 수 없는 새벽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거의 모든 게임 참가자들은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다. 경쟁자를 없애기 위해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였고, 이기기 위해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배신했다. 도저히 가망이 없는 상황에도 혼자 죽는 대신 증오하는 사람과 같이 죽는 것을 택했다. 작품은 이를 통해 극한의 상황에서 추악해지는 인간의 본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지영은 생존 본능에 휘둘리지 않았다. 생존이 곧 승리인 서바이벌 게임과는 분명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였다.
지영이 이와 같은 선택을 한 이유는 삶을 바꿔보겠다는 욕망이 없어서다. ‘과반수가 동의하면 게임을 중단할 수 있다’는 룰이 보여주듯 이 게임에서 중요한 건 참가자들의 의지다. 참가자들은 책임져야 할 가족, 상금으로 인생을 바꿔보겠다는 욕망 등 각자의 이유로 게임에 참가했다. 하지만 ‘갈 데가 없어서’ 게임장으로 휩쓸려 온 지영에게는 바깥세상에서 만나야 할 사람도, 삶을 바꿀 의지도 없었다. 모두가 탐내는 거액의 상금도 그에게는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되지 않았다.
결국 지영이 보여주는 건 경쟁 사회 속에서 경쟁의 이유를 찾지 못한 사람의 최후다. 황동혁 감독은 작품의 제목 ‘오징어 게임’을 두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경쟁 사회를 가장 상징적으로 은유하는 게임”이라고 설명했다. 게임에서 스스로 발을 뺀 지영은 일확천금의 기회를 노릴 이유조차 없는 사람들, 그래서 포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경쟁에서 이탈한 사람에게 살아남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지영의 쓸쓸한 죽음이 전하는 메시지다.
출처 : https://www.sedaily.com/NewsView/22RM46IZ6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