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여드름 났다고 때렸던 김병장 나와라!” 예비역들은 지금 ‘군투’ 중
군대 폭력 다룬 ‘D.P.’
군필자들이 열광하는 이유
‘01 군번 ΟΟ사령부 의무대 황ΔΔ, 경상도 살던 81년생 윤XX. 이거 보고 반성 좀 하고 살아봐.’
‘밤만 되면, 내 부모님 들먹이면서 패드립(패륜적 드립의 준말·부모를 욕하거나 놀릴 때 쓰는 말) 남발하고, 나를 조롱한 95년생 차ΟΟ아. 너 때문에 우울증 남기고 내 손목 또렷한 선만 남았다.’
한국의 군대 폭력을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D.P.(Deserter Pursuit·탈영병 체포 전담조)’ 열풍이 거세다. 군 복무를 한 남성들은 물론 여성 시청자들까지 호평을 쏟아내고 있다. 특히 병영 문화 개선이 시작되기 전인 2000년대 전후 군 생활을 했던 예비역들은 “내 안에 도사리고 있던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보게 됐다” “CCTV 달고 촬영한 것 같다”며 괴로워하기도, 통쾌해하기도 하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다. 인터넷에는 자신이 당했던 엽기적인 ‘갈굼’을 애통하게 표현한 글이 올라오고, 십수년 전 자신을 괴롭혔던 고참의 실명을 들이대며 폭로하는 사람들까지 등장했다. ‘미투(성폭력 고발 운동)’에 빗대 ‘군투’라는 말까지 나왔다.
육군에 따르면 지난 2010년 탈영으로 입건된 병사 수는 649명. 10여 년이 지난 2019년 탈영병 숫자는 92명으로 급감했다. 극단 선택을 한 장병 수도 같은 기간 92명에서 62명으로 줄었다. 서욱 국방장관도 “(드라마 중) 가혹 행위는 극화돼 있는 부분이 있다. 많은 노력을 통해 병영 문화가 개선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군대 내 폭행이나 가혹행위로 입건된 건수는 2017년 1240건에서 잠시 감소하는가 싶었는데, 지난해에는 다시 증가해 2019년 대비 13%(114건) 늘었다. 최근엔 해군 일병이 선임병들의 가혹행위로 극단 선택한 일이 발생했다. ‘D.P.’ 신드롬의 진원은 과연 무엇일까.
◇완전 내 얘기, 대리 만족 느꼈다
드라마 ‘D.P.’는 탈영병을 쫓는 이등병(정해인)과 상병(구교환)을 중심으로 군내 부조리 실태를 고발한다. 가혹 행위를 견디지 못한 일병은 자신을 괴롭힌 고참이 전역하자, 탈영한 뒤 직접 찾아가 폭행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1990년대 후반 수도군단 헌병대에서 복무한 카드 회사 김모(46) 부장은 “대한민국 남성이면 누구나 군내 가혹 행위나 부조리를 겪는데, 제대만 하면 ‘더럽지만, 다시 겪을 일 아니니 그냥 모른 척하자’며 가슴에 묻어둔다. 그 부조리를 세상 밖으로 제대로 끄집어내 준 사실상 첫 영상물이라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1990년대 후반 강원도 화천에서 복무한 정모(47)씨는 “우리 내무반에서도 망나니 같은 고참이 전역했는데, 평소 그에게 앙심을 품은 한 상병이 고참이 복학한 부산 모 대학에 칼을 들고 찾아간 사건이 있었다. 우리가 실제 겪은 상황을 그려주니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나”라고 했다.
이른바 ‘대리 만족’을 느꼈다는 반응도 넘쳐난다. 극 중 조 일병은 가혹 행위를 당하다 고참 병사를 폭행하고 탈영을 감행한다. 임모(41)씨는 이등병 시절, 경기도 과천의 한 부대에서 가혹 행위에 항의하며 고참 병사의 머리를 소총으로 때린 경험이 있다. 그는 “조 일병이나 내 행동은 잘못이지만, 드라마를 보니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조 일병이 고참을 때리는 장면을 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꼈다”고 했다.
‘군투’도 등장했다. 과거 자신을 괴롭혔던 선임병의 이름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며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는 ‘상무대 육군 포병학교 2009년 군번 박ΟΟ 이거 보고 반성해라. 나중에 네 아들도 군대 가서 똑같이 당해라’ ‘36사단 군악대 ΟΟΟ 잘 있냐. 난 네가 잘 살길 바라지 않을게’ ‘전투대대 김ΔΔ 보고 있냐. 네 놈이 여자 친구랑 싸웠다고 때리고, 네 놈 얼굴에 여드름 났다고 때리고. 살아있다면 제발 죽어다오’ ’37기동대대 고XX, 눈에 띄면 넌 뒤져~’ 같은 글들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다.
◇“PTSD 오지게 오더라”
‘드라마를 보다 나쁜 기억이 떠올라, 다 보지 못했다’고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서울 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네티즌은 “첫 외출 때 중대가(歌)와 군가 외워오라고 시킨 선임이 생각나서 (드라마를) 못 보겠다. 부모님 두 달 만에 보는데 군가 외워오라고 해서 밥 먹으면서 군가 외우니까 어머니가 우셨다. PTSD 세게 오네”라고 적었다.
PTSD란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나서 나오는 심리적 반응. 전쟁이나 사고 등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후 공포감을 갖게 되고, 그 후로도 고통을 느끼게 되는 병이다. PTSD는 미국에서 월남전을 겪고 난 뒤 어려움을 겪는 군인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발전했을 만큼 군대와 밀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군 시절 PTSD를 느낀 사람이 적지 않은 것도 드라마 인기에 한몫한다고 분석한다. 이창한 행복찾기정신과의원 원장은 “지독한 가혹 행위를 겪지 않았더라도, 드라마를 통해 군 시절 안 좋았던 경험을 떠올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전역을 하고도 여전히 심하게 생각 나는 장면은 아직 치유되지 않았다는 뜻이라, 항우울증 약물 등 치료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내 직장도 크게 다르지 않아”
드라마는 군대를 다뤘지만, 현실 사회와 고달픈 직장 생활도 별반 다르지 않아 공감의 폭이 커졌다는 반응도 나온다. 수도군단 헌병대에서 근무했던 김모(46)씨는 “실제 탈영병 잡는 DP들은 군 생활 내내 머리를 기르고 바깥에 나가 생활할 수 있는지라, 소위 ‘백’ 있는 친구들이 차지했다. 불합리하다는 건 누구나 알았지만, ‘원래 군대는 그런 곳’이라며 넘겼다. 우리 사회도 그런 불공정이 많지 않나. 군대나 사회가 크게 다르지 않아 공감이 됐다”고 말했다. 이창한 원장도 “단지 일찍 입대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걸 마음대로 해도 되는 군대 문화가 20~30대의 공분을 샀다. 최근 들어 ‘공정’이 쟁점이 되는 상황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드라마 속 군 간부들이 자신의 직장 상사와 비슷하다며 공감하는 목소리도 있다. 극 중 헌병대장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문제가 생기면 부하에게만 책임을 떠넘기는 인물로 묘사된다. 또 자신의 부대원이 탈영하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총으로 무장한 특임대원들을 출동시킨다. 한 보험회사 팀장으로 일하는 조모(46)씨는 “보험회사에서는 고위 간부가 오랜 기간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실적을 강조하고, 부하 직원들은 아침 조회 때마다 실적 압박에 시달리다 보니 불완전 판매(내용이나 투자 위험성을 제대로 안내하지 않고 금융 상품을 판매)에 내몰린다. 군 간부들이 앞뒤 안 가리고 자기 자신만 챙기는 모습이 우리 회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고 말했다.
부조리를 눈감아야 하고, 제대로 알릴 기회조차 없는 현실 때문에 드라마에 공감했다는 반응을 내놓기도 했다. 강원도 화천에서 군 복무했다는 40대 직장인은 “이등병 시절 소원수리함에 내무반 내 각종 부조리를 고발하는 쪽지를 써서 냈는데, 돌아온 건 선임병들의 조롱과 무시였다. 지금 우리 회사도 후배들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문제 해결에 나서면 오히려 반항하는 직원으로 찍히지 않나. 사람들이 익명 게시판이나 드라마에 열광하는 건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