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뷰티로 영역 확장... '베트남 한류'의 거침 없는 질주
- 입력
- 2021.02.25 04:40
<19> 2021 베트남 한류 시장
편집자주
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배우 박서준을 직접 만나 본 적 있어요?”
베트남에서 인연을 맺은 20대 현지인 통역사들은 친해지면 항상 비슷한 질문을 한다. 한국인들이 유럽 사람들을 만나면 “두 유 노우 손흥민(손흥민을 아느냐)?”을 외치듯, 이름이 드라마 주인공이나 유명 화장품 모델로 바뀔 뿐 ‘혹시나’하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한결 같다. 특파원 부임 초기 베트남인들이 싸이나 소녀시대의 근황을 묻던 패턴이 K뷰티와 K드라마 영역으로 확장된 게 다르다면 다른 부분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난해 하반기부터 베트남 곳곳에서 볼 수 있는 G화장품 종합판매점 앞에는 한국 연예인들의 입간판이 부쩍 늘었다. 24일 기준 베트남 넷플릭스에서 인기 콘텐츠 2,3위에 올라있는 드라마도 최근 한국에서 방영을 시작한 ‘빈센조’와 ‘시지프스’다. 지난 1년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문화 교류가 사실상 중단됐지만, 베트남 내 한류 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이유가 뭘까.
新 한류 투톱 드라마와 뷰티
한류 시장의 성장세는 통계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한국국제교류문화진흥원이 발간한 ‘2021 한류실태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베트남의 한류 연관 소비 수치는 평균 31.5%를 기록했다. 전 세계 평균(21.4%)보다 10%포인트 이상 높다. 현재 베트남에서 가장 ‘핫’한 한류 콘텐츠는 뷰티(40.0%)와 드라마(39.7%)다. 절대 강자로 군림하던 K팝(34.9%)은 3위로 밀려났고, ‘기생충’ 등 영화(34.2%)와 ‘런닝맨’을 필두로 한 예능(32.9%)이 K푸드(24.2%)를 제친 것도 눈에 띈다.
뷰티ㆍ드라마의 급성장은 전략적 상생의 산물이다. 한국 드라마가 베트남에서 흥행하면 남녀 주인공을 모델로 한 뷰티 사업이 활성화되는 식이다. 베트남인들이 한류 콘텐츠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배우나 아티스트의 매력적인 외모(50.5%)’라는 점을 철저히 공략한 덕분이다. 한류 드라마는 최근 베트남 공중파와 넷플릭스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공을 들여 접근성을 한층 극대화했다. 뷰티 콘텐츠도 인기 배우들의 멋진 외모를 앞세워 ‘한국 화장품=우수 품질’이라는 공식을 만들었다. 그 결과, ‘이태원 클라스’ 등 한국 드라마 7편이 2020년 베트남 넷플릭스 인기 콘텐츠 10위권에 들었고, 뷰티 제품의 베트남 수출액은 전년 대비 18% 증가했다.
영화와 K푸드 영역도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한국영화 ‘완벽한 타인’의 베트남 버전인 ‘붉은 달빛 축제’는 지난해 2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4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베트남 영화산업 관계자는 “정확한 관객 집계 시스템이 없는 베트남에서 200만은 한국의 1,000만 관객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K푸드 중에는 오리온이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다. 오리온은 베트남 스낵 시장에서 브랜드 파워 2위까지 치고 올라간 쌀과자 ‘안’에 이어 출근길 식사대용 빵 ‘세봉’이 얼마 전 제과시장 점유율 1위에 등극했다.
한류 소비의 큰 손 '여신 세대'
베트남 한류의 중흥은 역설적이게도 ‘코로나19 위기’라는 날개가 있어 가능했다. 비대면 생활이 일상이 되면서 드라마, 영화, 음악 등 온라인 유통 가능한 한류 콘텐츠가 OTT 시장의 급성장과 맞물려 톡톡히 덕을 본 것이다. 실제 한류를 접한 베트남인의 70%는 지난해 OTT를 통해 콘텐츠를 접한 것으로 나타났다. 5년 전만해도 해당 비중은 40%에 불과했다. 코로나19 확산 여파로 세관 절차가 강화돼 중국산 제품 밀수가 급격히 줄어든 것도 한류 인기에 플러스 요인이 됐다. 특히 화장품의 경우 기존 뷰티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던 한국과 일본 화장품의 ‘짝퉁’ 제품 밀수가 끊기면서 수익성이 크게 높아졌다고 한다.
이른바 ‘베트남 여신 세대’의 등장 역시 확장 중인 한류 시장에 천군만마가 되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 출생한 사회초년생 여성인 이들은 한류가 강점을 보이는 OTT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놀이처럼 즐기는 세대다. 1970년대 태어난 전후 세대와 달리 외국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 베트남 최대 소비계층으로 자리 잡았다.
여신 세대는 청소년기에 일찌감치 K팝을 받아들여 한류에 상당히 우호적이다. 10년 전 빅뱅과 소녀시대를 시작으로 2NE1, 엑소 등이 베트남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 당시 미성년자였던 20대 초ㆍ중반 여성들은 이제 한류 상품을 구매하는 큰 손 역할을 하고 있다. 2015년 빅뱅 콘서트를 찾은 적이 있다는 A(22)씨는 “학생 때는 환호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취업을 하면서 친구들과 한국 제품을 공동구매하고 있다”며 “송년 파티 드레스 코드로 한복을 입을 정도로 한류는 유쾌한 우리의 일상”이라고 말했다.
올해 베트남 한류 시장의 전망도 밝다. 한 여론조사에서 베트남 한류 경험자 88.2%는 “감염병 사태가 끝나도 한류에 대한 관심은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43.4%는 “올해 한류 관련 소비를 더 늘리겠다”고 답했다. 북부 타이응우옌성(省)의 쇼핑몰에서 일하는 B씨(24)는 “해외여행이 재개되면 이태원에 가기 위해 친구들과 돈을 모으고 있다. 한국에서 여동생이 좋아하는 BTS 굿즈(기획상품)도 꼭 구매해 돌아올 생각”이라며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