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빌 게이츠가 한국에 있었다면
서경호 기자
힘든 사회문제 해결 노력 돋보여
기후변화에 원전 필요하단 주장
원전 마피아로 비난 받았을 것
‘모든 인간의 가치는 동등하다(All lives have equal value).’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 부부가 운영하는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 홈페이지 대문에 걸린 캐치 프레이즈다. 그 밑에 ‘우리는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일하는 성미 급한 낙관주의자’라는 작은 글씨가 달렸다. 매년 50억 달러(5조 5000억원) 이상을 쓰고 1600명이 일하는 최대 규모의 자선단체다.
2019년작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빌 게이츠(Inside Bill’s Brain)’를 보면 왜 저런 슬로건이 나왔는지 알 수 있다. 빌 게이츠는 깨끗한 물을 먹을 수 없어 설사병으로 사망하는 빈곤국 아이를 위해 화장실 문제에 매달리고, 소아마비로 평생을 힘들게 살지 않도록 아프리카에 백신을 전파한다. 빈국 어린이의 삶도 부자나라 아이만큼 중요해서다.
다큐멘터리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햄버거였다. 아침은 먹지 않는다. 회의 시간은 분 단위까지 정확하게 지킨다. 갑부인 빌 게이츠도 시간만큼은 더 살 수 없어서란다. 산책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자주 갖는다. 우선순위에 따라 추려야 몰두할 수 있어서다. 빌 게이츠는 MS 시절부터 혼자만의 ‘생각 주간(think week)’을 가져왔다. 커다란 토트백에 책을 가득 담고 외떨어진 별장으로 떠나 ‘나 홀로’ 독서시간을 즐긴다.
한때 일각에서 ‘실리콘밸리의 악마’로까지 불렸던 빌 게이츠가 2006년 이후 재단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존경받는 사회사업가로 변신하는 과정은 인상적이었다. 그는 동시대 세계와 사회의 어려운 문제를 정조준했다. 그저 불쌍한 이들을 돕자는 차원이 아니다. 동일한 출발선에 설 수 없는 빈국 국민에 백신을 나눠주고 기술 혁신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최적의 해법을 찾아낸다. 보건·위생과 교육, 기후 변화 이슈에 집중하고 관련된 벤처기업에 직접 투자하기도 한다.
게이츠 부부는 재단 홈페이지에 올린 편지에 “안전한 프로젝트는 접어라. 진짜 힘든 문제와 대결하라”는 세계적인 투자자 워런 버핏의 조언에 100% 동감한다고 썼다. 버핏은 빌 게이츠의 오랜 친구이자 재단에 300억 달러 이상의 기부를 약속하고 매년 13억~27억 달러를 내고 있다. 빌 게이츠는 “정부와 기업이 감히 뛰어들지 못하는 유망한 분야에 과감하게 베팅하는 것이야말로 자선의 핵심적 역할”이라고 했다.
최근 재산의 절반 이상(현 시세로 5조원 이상)을 기부하겠다고 발표한 김범수 카카오 의장도 기존 방식으로 풀 수 없는 사회문제 해결을 기부의 목적으로 내세웠다. 김 의장은 평소 미국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의 시 ‘무엇이 성공인가’에 나오는 구절 ‘내가 태어나기 전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를 좋아했다고 한다.
원전 이슈도 부각됐다. 지난주 『빌 게이츠, 기후 재앙을 피하는 법』이 전 세계에서 동시 출간되면서다. 빌 게이츠는 이 책에서 매년 배출되는 510억의 온실가스를 2050년까지 제로(0)로 줄여야 한다고 썼다. 이를 위해 원자력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문재인 정부의 무리한 탈원전 정책으로 담당 공무원이 재판에 넘겨진 와중에 빌 게이츠의 친원전 발언이 나와 주목받았다. 하지만 그가 원전을 전력 생산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긴 건 이미 오래전부터다. 2006년 에너지 인프라의 핵심으로 원전을 염두에 뒀고, 2008년 원전 혁신기술을 연구하는 테라파워를 세웠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에서도 원전이 석탄 발전보다 안전하다며, 새로운 설계 기술이 도입된 신형 원전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넓고 깊게 공부하는 빌 게이츠의 학습 결과는 이렇다. 지난주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싸고 믿을 만한 전기를 얻는 방법은 세 가지뿐이다. 전력망 저장 배터리 기술에 기적이 생기거나, 원전(핵분열) 아니면 핵융합이다.” 지금의 배터리 기술이나 아직 연구단계인 핵융합 기술을 생각하면 원전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얘기다.
문재인 정부는 정권 초반인 2017년 7월 100대 과제를 발표할 당시엔 ‘탈원전 정책’이라고 표현했다가 그해 10월 국무회의에선 ‘에너지 전환(탈원전)’으로 병기하더니 그 이후 탈원전이란 표현을 아예 삭제했다. 탈원전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었겠지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다. 그 후 과학적 연구에 근거한 원전 논의는 사라지고 서슬 퍼런 구호와 윽박지르기만 남았다. 빌 게이츠도 한국에선 ‘원전 마피아’라는 비아냥이나 들었을 것이다.
서경호 경제·산업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