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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일본은 韓流의 텃밭이자 발판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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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숲속의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신고 회원메모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movieli.st 작성일21.02.19 11:34 34,97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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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韓流의 텃밭이자 발판

 

2021.02.19

글 :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202103 

 

 
⊙ 일본에서 韓流 수익의 3분의 2 벌어들여… 일본에서 돈 벌어서 미국 등 진출 뒷받침하는 구조

⊙ 일본 시장… 팬덤 문화 존재, 문화정서 유사, 경제력 등으로 韓流의 가장 큰 시장
⊙ 韓流의 뿌리는 1980년대 중반 조용필·계은숙이지만, 트로트라는 점에서 국내에서는 저평가…
⊙ 韓流는 동남아·중국에서 시작되어 일본으로 진출한 게 아니라, 일본에서 시작해 다른 나라로 퍼져나간 것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TV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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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13일 일본 지바시 마쿠하리 멧세 전시장에서 열린 한류 페스티벌 케이콘에 참석한 일본 관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하고 있다. 사진=CJ E&M
  새해가 밝자마자 국내 대형 K팝 기획사 그룹들이 연이어 일본 시장용 일본어 앨범을 발매하고 있다. 지난 1월 20일 방탄소년단 소속사 빅히트엔터테인먼트의 투모로우바이투게더를 시작으로 일주일 뒤인 1월 27일에는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슈퍼주니어, 같은 소속사 그룹 NCT127은 2월 17일에 일본어 앨범을 내놓았다. 그리고 3월 31일에는 YG엔터테인먼트 그룹 트레저가 결성 후 첫 일본어 앨범을 발매할 예정이다.
 
  물론 K팝 그룹이 일본어 앨범을 내놓는 건 그 역사가 사반세기쯤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다. 그러니 그 자체로는 전혀 특별한 일이 못 된다. 다만 지금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라는 점이 이목(耳目)을 끈다.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 기본적인 홍보 활동조차 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어찌 됐건 각 그룹이 일본어 앨범은 꾸준히 발매하고 있다는 것. 돌이켜보면 서로 오가기에 힘들긴 마찬가지였던 지난해에도 방탄소년단, 트와이스, 아이즈원 등 수많은 K팝 그룹이 일본 시장용 일본어 앨범을 내놓았다. 서로 오갈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국내에서 촬영한 무대영상을 일본 방송사로 보내 일본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시키고 화상(畵像)통화 팬 미팅을 기획하는 등 다양한 대체(代替) 방안들을 고안해내기도 했다.
 
 

  그런데 왜 일본 시장에 대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지금 K팝 대형 기획사들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미국 시장만 해도 영어 앨범은커녕 가끔씩 영어 노래 한두 곡 온라인으로 서비스해주는 정도가 전부인데 말이다. 그나마 미국만 해도 나름대로 특별한 케이스이고, 그 외에 중국 등 여타 시장들에는 그런 서비스 자체가 아예 없다시피 한 실정이다.
 
 
  ‘K팝 글로벌화’의 본모습
 
  사실 이유는 단순하다. 일본은 코로나19 상황하에서 그 정도 방편만 취해도 이전과 비슷한 수준의 수익을 얻어낼 수 있는 가장 충성도 높은 해외시장이자,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되고 난 뒤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절대 넋 놓고 방치해둬선 안 될 가장 중요한 시장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그 정도로 K팝 해외시장 중 수익적(收益的) 측면에서 압도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캐시카우(cash cow) 시장이란 것이다.
 
  당장 지난해 관세청이 발표한 2020년 1~11월 국내 음반 수출 자료만 봐도 상황을 쉽게 알 수 있다. 해외로 수출된 국내 음반 중 무려 48.6%가 일본 수출 물량이었다. 전체의 거의 절반 비중을 차지한다. 2위 미국과 3위 중국 수출량을 합쳐도 일본 물량의 절반을 조금 넘어서는 정도다. 음반 판매 외에 해외 현지 공연 등 다양한 수익처가 존재했던 ‘코로나19 이전’ 상황을 살펴보면 그보다 더 엄청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발간한 《2019 음악 산업백서》에 따르면, 2018년 한국음악산업 전체 수출액의 무려 65.1%가 일본 시장에서 발생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절반도 아니라 3분의 2 수준이다.
 
  이게 현시점 ‘K팝 글로벌화’의 실제 본모습이다. ‘사실은’ 일본 시장에 매우 편중(偏重)돼 있는 구조다. 아무리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등이 미국 빌보드 차트를 휩쓰는 시점이라 해도 그렇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해외 각국에서 그 비결을 궁금해하는 ‘K팝 글로벌화’ 전략의 본질도 실질적으로는 일본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을 미국 등 상대적 미개척지(未開拓地) 진출의 동력(動力)으로 삼아온 흐름이었다고까지 볼 만하다.
 
  물론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미국 등 다른 시장들이 향후 더 탄탄하게 개척된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어찌 됐건 ‘아직까지는’ 이게 현실이다. K팝 한류(韓流)는 일본 시장에 매우 의존적으로 작동되고 있다. 그러니 비록 활동에 한계가 있는 코로나19 상황이라도 어찌 됐건 기획사 측 여력(餘力)이 닿는 한 무조건 일본 시장용 일본어 음반부터 준비해 내놓고 있는 것이다.
 
 
  팬덤 문화
 
  사실 K팝에 어느 정도 관심 있는 이들이라도 이 같은 현실, 즉 수익 구조의 3분의 2 수준까지 일본 시장에 편중(偏重)된 상황을 알게 되면 상당히 놀라곤 한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하나 상황을 따지고 보면 시장 구조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구성돼 있다. 간단히 줄이자면, 현시점 K팝의 중심은 아이돌이고 아이돌 산업 수익 구조는 근본적으로 ‘팬덤 문화’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팬덤 문화’ 기반 수익 구조라는 게 사실 별다른 게 아니다. 일반적인 음악 향유(享有) 감각, 즉 가수의 음악 활동 자체만을 즐기려는 기분 정도로는 ‘사지 않을 것’들을 ‘파는 것’이다. 단순히 음악과 퍼포먼스를 즐기기 위해 선택하는 디지털 음원(音源)과 유튜브 등에서 발생되는 수익은 생각만큼 크지 않다. 적어도 막대한 비용이 투자되는 아이돌 그룹 하나를 뒷받침해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글로벌 스타가 돼 전 세계적으로 불티나게 음원과 유튜브가 스트리밍되기 전까지는 그렇다. 그러니 음원이나 유튜브를 통해 생성(生成)된 충성도 높은 팬덤에 ‘다른 것’들을 팔아야 한다.
 
  대표적으로 CD, 즉 실물(實物) 음반이 있다. 요즘 CD로 음악 듣는 사람은 거의 없다. 디지털 음원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팬덤 문화’ 속 팬심(心)으로는 그런 CD들조차 일종의 관련 팬시상품으로서 사들이게 된다. 그 밖에도 많다. 가수 모습이 담긴 사진집이나 달력, 휴대폰 케이스, 필기구, 티셔츠 등 각종 의류, 공연 때 사용할 응원봉, 공연 DVD 등 수많은 관련 상품이 팔려나간다. 그리고 해당 가수 노래들을 많이 알지 않고서는 좀처럼 찾게 되지 않는 공연 티켓도 판다.
 
  물론 미국과 유럽 음악 시장에도 그 비슷한 수익 구조가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공연은 서구(西歐) 쪽이 훨씬 활성화돼 있는 편이다. 그러나 K팝 산업 수익 구조에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서구 소비자들 자체가 K팝 식(式) 아이돌 ‘팬덤 문화’에 익숙지 않다 보니 한국처럼 고도화(高度化)된 상품 전략이 먹혀들기 힘들다. 그러니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는 유튜브나 스트리밍 서비스 등을 통해 K팝에 빠져들었더라도 ‘팬덤 문화’에는 적응되지 않아 실질적 수익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근래 서구에서 꾸준히 K팝 팬들이 증가하는 상황이더라도 그들이 절대적 수익처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중국은 가장 위험한 韓流 시장
 
  한편, K팝이 대중문화 중심에 서 있는 동남아시아 지역은 또 다른 문제다. 미국·유럽이 ‘익숙지 않아’ 큰 수익처가 돼주지 못한다면, 동남아시아는 아직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못해 수익을 내주기 어렵다. 물론 K팝 유튜브 조회 수 측면에서 가장 큰 지분(持分)을 차지하는 게 동남아시아이긴 하지만, 언급했듯 유튜브만으로는 이렇다 할 수익이 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유튜브 수익은 시청자가 위치한 국가의 광고 단가(單價)에 따라 책정(策定)되는 것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한국에 비해 1인당 GDP가 10분의 1 또는 그 이하 수준인 국가들의 광고 단가가 높을 리는 없다.
 
 

  그러면 이제 중국이 남는다. 그래도 중국은 여러모로 K팝 아이돌 식 ‘팬덤 문화’에 적응하려는 분위기이긴 하다. 그런데 여기는 또 중국 정부가 그 소비를 막아 세운다. 지금도 여전히 2016년 사드(THAAD) 배치 문제로 시작된 ‘한한령(限韓令)’ 보복(報復) 조치가 풀리지 않은 상황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이런저런 보복들이 늘어만 간다. 예컨대, 지난해 10월 방탄소년단이 대한상공회의소로부터 한미(韓美)관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밴플리트상을 받자, 중국은 방탄소년단의 수상 소감을 꼬투리 잡고 또다시 한류 전반에 걸쳐 제동을 걸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중국 시장 규모 자체는 크고 이제 중국도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넘은 상황이라 그 소비력(消費力)도 기대할 만하긴 하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은 한류 차원에서 가장 불안정하고 위험한 시장이기도 한 셈이다. 기대를 거는 쪽이 오히려 무모(無謀)한 것이다.
 
 
  일본이 K팝 최대 시장인 이유
 
  그러면 이제 해외시장 중에서 무게를 둘 곳은 일본밖에 남지 않게 된다. 먼저 한국 아이돌 산업의 ‘팬덤 문화’ 수익 모델 자체가 애초 일본의 그것에서 힌트를 얻어 들여온 측면이 강하니 그에 부적응(不適應)할 일도 없다. 일본 K팝 팬들은 사실상 한국 팬들 이상의 왕성한 관련 상품 소비로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일본 시장에서는 특히 공연수익 측면에서 기대치가 남달라진다.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 나라에서는 현지 공연 시 현지 공연기획사가 미니멈 개런티 계약, 즉 일정 수준 출연료에 서로 합의한 뒤 그 금액만 받고 공연을 해주는 형식을 제시하는 반면, 일본에서는 K팝 가수들에 인센티브 계약을 체결해주기 때문이다. 그 수익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일본 시장이 K팝 해외 수익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기묘한 현실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일단 소비력 있는 나라이면서 K팝 수익 모델을 뒷받침해주는 ‘팬덤 문화’가 서로 같고, 아무리 정치·외교적 갈등이 빚어지더라도 최소한 ‘아직까지는’ 문화 분야에까지 이런저런 제한 조치나 정책적 불이익을 안겨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안정적이면서 또 가장 탄탄한 시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K팝이 향후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지금보다 더 큰 인기를 얻게 되더라도 최대시장은 여전히 일본이 되리라는 예상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물론 이외에도 일본이 K팝에 가장 유리한 시장인 이유는 많다. 근본적으로는, 인접국(隣接國)끼리 특유의 문화정서 유사성이 큰 역할을 차지하기도 한다. 인접국끼리는 대부분 정치·외교적으로 앙숙 관계더라도 문화적으로는 서로 강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어 결국 서로 비슷한 성격의 문화상품들을 함께 향유(享有)하게 된다는 논리다. 한국・일본 외에도 프랑스・영국 등 수많은 인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러니 특별히 해외 팬들을 위한 전략을 따로 마련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일본 시장에서만큼은 한국과 똑같이 바로 반응이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 만큼 일본 시장에서는 한국 대중문화 상품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주류(主流) 문화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잦은 편이다. 세계 1위 규모 미국 음악 시장은 그야말로 ‘가장 잘나가는’ 몇몇 그룹만 도달(到達)해 활약할 수 있는 정도지만, 바로 뒤를 잇는 세계 2위 일본 시장은 그보다 훨씬 K팝에 열려 있어 문턱이 상당히 낮다는 얘기다. 수혜(受惠)를 입는 그룹들이 미국 시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러다 보니 일본 내 한국 대중음악 소비의 역사도 꽤나 긴 편이다. 한국에서는 대략 2002~2003년 가수 보아의 일본 진출을 그 시작점으로 보고, 일본에서도 대개 그렇게 본다. 예컨대 일본 《요미우리신문》에서 지난해 6월24일자 토요엔터테인먼트 코너에 게재한 기사에서도 일본 내 한류 흐름을 딱 그렇게 파악한다.
 
  먼저, 일본에 진출한 한국 가수 보아와 KBS2 TV 드라마 〈겨울연가〉가 거의 동시에 선풍적 인기를 끌던 2003~2004년경을 ‘1차 한류’로 규정한다. 이어 2010~2012년 소녀시대·카라·빅뱅 등 K팝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붐이 일어났던 때를 ‘2차 한류’로, 이후 각종 혐한(嫌韓)시위 등 탓에 일본 지상파 방송에서 더 이상 한류를 방영해주지 않았음에도 유튜브 등 인터넷 기반 플랫폼을 통해 다시금 붐이 일어나던 2016년경을 ‘3차 한류’로 본다. 그리고 지금은 ‘4차 한류’란다. 넷플릭스 등 OTT 서비스를 통해 난공불락(難攻不落)과도 같았던 일본 중장년 남성층까지 한국 드라마에 열중하게 된 시점이기에 따로 분류한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한류 해석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 일단 일본 중장년 남성층이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를 받아들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대중음악이 일본 시장 내 주류(主流) 흐름을 탄 것도 보아가 처음은 아니었다.
 
 
 
 
紅白歌合戰
 
  이를 좀 더 면밀히 알아보려면 일본 공영방송 NHK에서 매년 12월 31일 방송하는 음악 프로그램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戰)〉 상황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1951년 시작해 지난해 69회째를 맞이한 〈홍백가합전〉은 여전히 일본 방송계에서 연간 최고시청률을 기록하곤 하는 국민적 음악 프로그램이다. 최고 전성기에는 시청률 80%를 넘어서기도 했고, 지상파 방송 시청률이 급격히 떨어진 2010년대 들어서도 40%대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의 슈퍼볼’이라고도 불린다. 이처럼 엄청난 프로그램이기에 일본 대중음악계에선 〈홍백가합전〉에 섭외돼 출연하는 것 자체를 곧 대중가수로서 일류(一流) 수준임을 인정받았다는 징표로 여기기도 한다. 실제로 아무나 데려다 노래시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인기와 영향력을 인정받은 가수들만 섭외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 〈홍백가합전〉에 섭외 받아 출연한 한국 가수는 보아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많은 선배 가수 사례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들은 보아처럼 젊은 층 대상 댄스 팝을 부르는 가수들도 아니었다. 보아가 첫 출연했던 2002년 이전까지 〈홍백가합전〉에 출연한 한국 가수들과 그들이 무대에서 부른 노래들을 한번 살펴보자.
 
  1987년 조용필(창밖의 여자)
  1988년 조용필(한오백년), 계은숙(すずめの涙)
  1989년 조용필(Q), 계은숙(眞いどれて), 김연자(朝の国から), 패티김(이별)
  1990년 조용필(돌아와요 부산항에), 계은숙(真夜中のシャワ-)
  1991년 계은숙(悲しみの訪問者)
  1992년 계은숙(都会の天使たち)
  1993년 계은숙(アモ-レ ~はげしく愛して~)
  1994년 계은숙(花のように鳥のように), 김연자(川の流れのように)
  2001년 김연자(イムジン河)
 
  일단 1987년부터 4회 연속 출연한 조용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1989년이 되자 한국 가수 4명이 한꺼번에 출연하기도 했고, 1990년에는 조용필이 서울 롯데월드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열창하는 모습이 일본으로 중계돼 〈홍백가합전〉 최초로 NHK홀이 아닌 곳에서 노래한 가수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계은숙은 총 7회 출연으로 아직까지도 한국 가수 중 〈홍백가합전〉 최다 출연 기록을 지키고 있다. 그다음이 보아의 5회다.
 
 
  1차 한류는 1980년대 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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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流의 元祖’ 조용필.
  이러니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가 처음 일본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進入)했던 실질적 ‘1차 한류’ 시점은 1980년대 중후반이었다고 보는 게 옳다는 것이다. 기준을 단순히 〈홍백가합전〉 출연만으로 잡지 않더라도 그렇다. 조용필의 경우 이미 1984년 일본 CBS-SONY 골든 디스크상, 1987년 일본 폴리스타 골든 디스크상을 받았고, 계은숙도 1988년 일본유선대상 엔카(演歌) 부문 그랑프리, 1990년에도 일본레코드대상 앨범 대상을 받은 바 있다. 이 외에도 당시 이 한국 가수들이 일본 대중음악계에서 어느 정도 위상을 차지했는지, 또 그들 노래가 일본 대중의 일상에 어느 정도로 파고들었는지 보여주는 자료는 많다.
 
  그런데 이 정도로 전에 없던 반향(反響)을 일으켰음에도 한일 양국 모두 이를 잊고 ‘1차 한류’ 시점을 엉뚱하게 10여 년 뒤로 규정하고들 있다. 어쩌면 그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할 수 있다. 1980~90년대에 일본에서 인기를 끈 한국 대중음악은 엄밀히 트로트 장르에 국한(局限)돼 있었고, 2000년대 들어 트로트-엔카가 한일 양국 대중음악 시장에서 철저히 비주류(非主流)화되다 보니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2000년대 관점(觀點)에서 상황을 바라보다 보니 ‘트로트-엔카 히트는 매우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성공에 불과하므로 진정한 한류였다고 보기 힘들다’는 식의 해석을 불렀을 수 있다. 정작 1980년대 당시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트로트-엔카가 대중음악 시장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고, 특히 일본에서는 엔카 음반이 100만 장 이상 팔려나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말이다.
 
  한편 또 다른 측면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한국미디어 측에서 ‘의도된 망각(忘却)’을 꾀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1965년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왜색(倭色)이 짙다는 이유로 금지곡(禁止曲)으로 지정된 이래 한국에서 트로트는 ‘일본 엔카에 뿌리를 둔 장르’라는 인식을 지우기 어려워졌다. 그러니 이 트로트로 일본에 진출했다는 것 자체에 복잡한 심경이 일었을 수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댄스 팝, 프로그레시브 록 등 다양한 장르 음악을 구사하며 활동해온 ‘가왕(歌王)’ 조용필이 일본에서는 트로트-엔카 가수로만 알려져 있다는 점에 더더욱 불편함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듯 새로운 관점에서 ‘1차 한류’를 1980년대 중후반으로 재규정하고 보면 2000년대 들어 이런저런 언론 미디어에서 제시해온 한류 역사와 계보는 크게 바뀌게 된다.
 
 
 
 
영화·드라마의 일본 진출
 
  많이 알다시피, 애초 ‘한류(韓流)’라는 용어가 탄생된 곳은 대만, 중국 등 중화권이다. 1997년 MBC TV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별은 내 가슴에〉 등이 중화권에서 큰 인기를 얻자 1998년 대만과 중국 언론에서 이를 두고 ‘하일한류(夏日韓流)’ ‘일진한류(一陣韓流)’ 등으로 표현하면서 용어가 퍼져나갔다. 한류 용어 자체가 탄생된 곳이 중화권이다 보니 한류 현상의 시발점이자 주요 거점도 늘 중화권인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짙어졌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보다 10년 이상 전부터 일본에서는 한국 대중음악을 주류(主流)의 일부로 받아들여왔다는 것이다. 대중음악뿐 아니라 영화도 그렇다. 한국 영화가 해외에서 주류적 성공을 거둔 첫 사례는 어디까지나 일본이 먼저였다.
 
  2000년 일본에서 개봉한 〈쉬리〉가 18억5000만 엔을 벌어들이며 당해 연간 흥행 통산 19위(〈글래디에이터〉 〈미녀삼총사〉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보다 높은 순위였다)에 올랐고, 이듬해 〈공동경비구역 JSA〉가 흥행수익 11억6000만 엔을 기록하는 등 한국 영화는 일본 시장에서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여타 아시아권에서 〈엽기적인 그녀〉를 기점으로 한국 영화 붐이 인 것은 그 뒤의 일이다. 그러다 2005년 〈내 머리 속의 지우개〉가 무려 30억 엔을 벌어들이며 당해 외국 영화 흥행 통산 8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 뒤 잠시 주춤했지만, 지난해 다시 〈기생충〉이 47억4000만 엔을 벌어들이며 연간 흥행 통산 3위에 올라 가장 주류적 성공을 거둔 해외 국가 자리로 돌아왔다.
 
  나아가 중화권이 열풍 진원지로 지목되는 TV드라마조차 상황을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연속드라마가 해외 지상파 방송에서 방영된 첫 사례는 1993년 중국 국영방송 CCTV를 통해 방영된 MBC 〈질투〉였지만, 이는 1992년 한중수교(韓中修交) 이후 양국 간 문화교류의 상징적 의미로서 방영된 경향이 강했다. 실제로 당시 중국에서는 〈질투〉가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1997년 열풍 시작까지 공백(空白)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 다음으로 한국 드라마를 지상파 방송에서 방영한 국가가 바로 일본이었다. 1996년, 《니혼게이자이신문》을 모(母)회사로 둔 규슈지역방송 TVQ에서 MBC 〈파일럿〉 〈화려한 휴가〉 〈질투〉 등을 수입해 방영했던 것이다. 이렇듯 연이은 편성의 이유는 단순했다. 반응이 예상보다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모두 지역방송 해외 드라마로서는 괄목할 만한 수치인 시청률 1~2%대를 기록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한국 드라마가 해외에서 처음 유의미(有意味)한 실적을 거둔 곳도 일본이었던 셈이다.
 
  결국 일본 한류는 지금 한국에서 많이 인식하듯 아시아권 전반에서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가 인기를 얻고 난 뒤 그 위상과 영향을 발판 삼아 일본까지 도달한 순서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사실상 일본이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한국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특히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어느 시점, 그러니까 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 일본은 꾸준히 한국 대중문화 각 분야에 걸쳐 관심을 갖고 점진적(漸進的) 확장 추세로 흡수해왔다고 보는 게 맞다. 지금 일본이 K팝 해외 수익 3분의 2를 차지하는 절대적 캐시카우 시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렇게 오랜 기간에 걸친 흐름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일본은 韓流의 텃밭이자 발판
 
  끝으로, 실질적으로 모든 K팝 한류의 시발점이 됐다고 볼 수 있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다시 돌아보자. 사실 일본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누리고 있는 인기와 위상은 생각보다 훨씬 엄청나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히트곡 중 하나로 꼽히는 수준이다.
 
  애초 1979년 일본의 코믹 엔카그룹 도노사마킹즈가 처음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리메이크한 게 일본 유입(流入)의 시작이었다. 이어 1983년 아쓰미 지로가 다시 리메이크해 70만 장 판매고를 올리면서 붐이 일어났다. 그 뒤 ‘오리지널 가수’인 조용필이 일본 시장에 입성(入城)하게 된 순서다. 그런데 이후로도 리메이크는 계속됐다. ‘엔카의 여왕’이라 불리던 미소라 히바리를 비롯해 야시로 아키, 모리 마사코 등부터 대만가수 등려군까지 일본어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리메이크했고, 2000년대 들어서도 미국 출신 흑인 엔카 가수 제로가 또 리메이크해 화제를 모았다. 그렇게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일본에서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외국 노래 중 하나로 꼽힌다.
 
  지금의 ‘K팝 글로벌화’와 그 절대적 동력이 돼온 일본 한류를 이해하기 위해선 바로 ‘여기’서부터 상황을 탐색해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오래전부터 뿌리를 내려왔으며, 그 어떤 종류 국가 간 갈등에도 사실상 변치 않고 지속돼온 안정감이 존재하는 시장이기에 ‘한류의 텃밭’이자 ‘발판’이 될 수 있었다는 점부터 말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부터 시작된 긴 여정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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