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마음을 훔친 영화人 〈11〉
덴젤 워싱턴(Denzel Washington) 上
이보다 더 ‘지적인 액션배우’가 또 있을까?
‘옛날 사람’ 티가 나는 걸 무릅쓰고 옛날 영화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다.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로, 그 마지막 시퀀스는 한국 영화사에 남을 만한 명장면이었다. 베테랑 형사(박중훈)와 마약 거래 조직 우두머리(안성기)의 우중 격투 신은 구두코에 떨어지는 빗방울까지 화면에 담은 극사실주의의 정수였다. 서로의 주먹이 상대의 볼을 드라마틱하게 가격하는 장면은 이후 여러 영화에서 오마주되기도 했다.
덴젤 워싱턴(Denzel Washington)이 전직 특수요원으로 등장하는 〈더 이퀄라이저〉(The Equalizer, 2014)의 엔딩 장면을 보며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21년 만에 떠올렸다. 아내가 남긴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소설 100권’을 읽는 게 유일한 취미인 주인공은 매일 새벽 두 시 책을 들고 카페를 찾는다. 어린 콜걸(클로이 모레츠)과 친해지지만, 그녀가 러시아 포주에게 폭행을 당하자 분노한 주인공은 러시아 마피아를 찾아가 1인 전쟁을 시작한다.
무겁고 둔탁한 액션이 돋보이는 이 영화에서 덴젤 워싱턴과 악한이 벌이는 극한 우중 결투 장면의 데자뷰는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그만큼 덴젤 워싱턴의 액션은 리얼했고, 무엇보다 멋졌다. 관록의 배우 리암 니슨이 〈테이큰〉(Taken, 2008)의 흥행으로 50대 중반에 새로운 액션 스타로 떠올라 63세에도 거친 동선을 소화한 〈테이큰 3〉(2015)까지 속편을 찍고, 칠순을 코앞에 둔 올해도 〈어니스트 씨프〉(Honest Thief)에 등장하며 노익장을 과시하듯, 덴젤 워싱턴 또한 〈더 이퀄라이저 2〉(2018)를 찍으며 총격전을 넘어 주먹과 발길질이 난무하는 거친 육박전으로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안톤 후쿠아 감독의 〈더 이퀄라이저〉(2014). |
지적인 풍모에 탄탄한 연기력
미국 뉴욕주 마운틴 버논에서 태어난 덴젤 워싱턴은 뉴욕 포드햄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한 지성파 배우다. NBC TV 영화를 통해 데뷔한 그는 1987년 남아공의 흑인민권운동가로 분한 〈자유의 절규〉(Cry Freedom, 1987)로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2년 뒤 남북전쟁의 참혹함과 인종차별을 묘사한 〈영광의 깃발〉(Glory, 1989)로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지적인 풍모에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그는 할리우드에서 흑백을 초월한 최고의 연기자이자, 영향력 있는 인물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흑백 차별을 이겨내고 배우로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한 데는 흑인 감독 스파이크 리와 손잡은 〈말콤 X〉(Malcolm X, 1992)로 베를린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는 살인자 누명을 쓰고 22년을 감옥에서 보낸 한 흑인 복서의 실화를 그린 〈허리케인 카터〉(The Hurricane, 1999)로 베를린영화제에서 두 번째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LA 경찰청 13년 경력의 타락한 마약 수사관 역으로 등장한 〈트레이닝 데이〉(Training Day, 2001)에서는 이전과 달리 악역을 펼쳐 제74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특히 그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은 1964년 시드니 포이티어 이후 흑인 배우로는 39년 만의 쾌거였다. 마침 그날 시상식에서 시드니 포이티어는 공로상을 수상했고, 그 시상자가 덴젤 워싱턴이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껄렁한 가죽점퍼를 걸치고 치렁치렁 목걸이를 두른 덴젤 워싱턴의 모습은 이전의 모범적이고 정의감에 찬, 단정한 이미지를 단번에 깨뜨렸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피의자의 생명까지 빼앗는 잔인무도한 부패 형사의 만행은 지옥의 바닥까지 내려가 보는 듯한, 아찔하지만 매혹적인 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노만 주이슨 감독의 〈허리케인 카터〉(1999). |
안톤 후쿠아 감독의 〈트레이닝 데이〉(2001). |
[톱클래스 2020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