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을 오가는 '그녀'가 펼치는 사이코 드라마
[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래치드
김형욱
20.10.08 14:46최종업데이트20.10.08 14:47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래치드> 포스터 ⓒ 넷플릭스
1960년대에는 전 세계에 참으로 많은 것이 휘몰아쳤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과 소련이 전 세계 패권을 차지하고자 모든 분야에서 대결하는 가운데, 어떤 나라의 어떤 사람들은 신세계를 맛보고 어떤 나라의 어떤 사람들은 전에 없는 파멸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히피 문화는 미국의 신세계라고 할 수 있을 텐데, 1950년대 저항의 분위기에서 도피의 분위기로 바뀌었다.
1962년 나온 소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1950년대 비트 세대의 저항 문화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미국 사회와 권력에 대한 안티테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책은 히피 세대의 도피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기도 하다. 15년 뒤에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밀로스 포먼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잭 니콜슨이 주연을 맡았다. 비록 원작자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영화는 길이 남을 명작으로 꼽힌다.
소설과 동명의 영화에 등장한 정신병원 간호사 밀드러드 래치드는 역대 최고 또는 최악의 '빌런'으로 손꼽힌다. 지금에 와선 빌런이라 칭하지만, 수십 년 전인 당시만 해도 '악인'에 다를 바 없었을 테다. 그래도 빌런이라 칭하기 위해선 사연이 필요할 터, 소설이 나온 지 어언 60여 년이 지나고 영화가 나온 지 45여 년이 지난 2020년 '래치드'라는 타이틀을 단 시리즈가 나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래치드>가 그 주인공이다.
라이언 머피가 총괄제작과 약간의 에피소드 연출을 맡고 그와 최고의 조합을 선보인 바 있는 세라 폴슨이 래치드 역을 맡았다. 그런가 하면,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연극과 영화 판권을 소유해 그 옛날 제작까지 했었던 마이클 더글라스가 이번에도 제작에 참여했다. 신시아 닉슨, 주디 데이비스, 샤론 스톤 등 쟁쟁한 여배우들이 주연급으로 세라 폴슨과 함께한다.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새다.
선악의 마음을 가진 그녀,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1947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루시아 정신병원은 원장 하노버 박사와 수간호사 벳시의 진두지휘 아래 잘 돌아가고 있다. 어디선가 나타난 래치드라는 이름의 간호사가 다짜고짜 하노버 박사에게 자신을 뽑아달라고 한다. 매몰차게 거절하지만, 그녀의 카리스마와 매력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와중에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공보 비서 그웬돌린을 앞장세워 루시아로 와선 재선을 위한 담금질을 하고자 한다. 여러 이유가 있었을 테지만, 무엇보다 신부들을 참혹하게 살해한 살인마 에드먼드가 루시아 정신병원에 임시수감되었기 때문이었다. 주지사로서는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에드먼드를 죽이고자 했고 하노버 박사의 정신감정이 필요했다. 한편 래치드는 하노버와 벳시는 물론 여타 간호사들과 환자들을 상대로 누군가한테는 천사같이 누군가한테는 악마같이 대하며 루시아를 점령해 나간다.
그녀의 목적은 명확했는데, 동생 에드먼드를 사형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법적으로만 친남매였던 바, 어릴 적 어느 위탁가정에서 만나 함께 참혹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함께했다. 이후 래치드가 에드먼드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래치드는 한없이 미안한 감정을 지닌 채 에드먼드를 찾기로 다짐했던 것이다. 하지만 루시아 정신병원 안팎에서 수많은 실타래로 엮인 관계들 때문에 에드먼드를 되찾기가 쉽지 않다. 래치드가 직접 나서서 실타래를 풀 수밖에 없다. 과연 그녀는 특유의 선과 악이 모두 어린 마음을 가지고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라이언 머피'의 색채가 묻어 있는 사이코 드라마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래치드>는 '라이언 머피'의 색채가 다분히 묻어 있는 작품이다. 화려하기만 한 게 아니라 디테일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완벽하게 정제된 미장센과 색감을 앞세워, 서사와 메시지보다 순간순간 번뜩이는 기지와 반전의 보는 재미로 중무장했다. 또 빠질 수 없는 LGBTQ 요소를 과하다 싶을 만큼 넣어서는, 신경을 긁는 또는 신경을 날카롭게 만드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다. 이로인해 호불호가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원작 또는 영감의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소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와 동명의 영화 모두 당대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해서 <래치드> 또한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 작품은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당대를 그리고자 한다. 눈에 보이는 복장과 화장과 제스처와 대사로 말이다. 즉, 캐릭터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말이다.
캐릭터성으로 들여다보면 보이는 게 있다. 종잡을 수 없는 주인공 래치드와 그녀의 살인마 동생 에드먼드뿐만 아니라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이 '돌아이'다. 보는 내내 '이 사람이야말로 진짜 돌아이네'라는 말을 수없이 되뇌었는데, 이 정도면 집단 정신 착란 증세가 아닐까 싶었다. 진정한 '사이코 드라마'가 이런 게 아닐까.
1940년대 후반 미국은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였을 테다. 하지만 전후 혜택을 최대로 받는 와중에, 혼란은 혼란대로 느끼고 또 상대적 박탈감은 전에 없이 커졌을 것이다. 세상이 급작스럽게 바뀌니, 어떤 나이 든 사람들은 옛날을 그리워하고 어떤 어린이들은 미래가 혼란스러웠을 거다.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거나 간접적으로나마 표현되진 않지만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러하다. 와중에, 래치드 선의를 보이는 이와 악의를 보이는 이 그리고 입체적으로 다가가는 이가 갈린다. 잘못이 없는 이에겐 선의를 보인다. 그들이 누구라도 다른 이들이 그들에 대해 뭐라고 하든 말이다. 소수자를 향한 한없이 따뜻한 시선이 엿보인다. 잘못이 있는 이에겐 악의를 보인다. 그들에겐 공통적으로 사연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입체적인 캐릭터에겐 그녀 또한 입체적으로 다가간다. 선의와 악의를 동시에 보이기도 하고 선의에서 악의로 또는 악의에서 선의로 선회하기도 한다. 이 시리즈의 재미 요소 중 하나다.
'재밌다' 보다는 '흥미를 돋운다' 정도
<래치드>를 한마디로 재밌다고 말하기엔 어폐가 있다. 콘텐츠를 두고 '재밌다' 한마디면 모든 게 정리되는 시대에 이 작품은 재밌다기보다 흥미롭다 아니, 흥미를 돋우다 정도가 어울린다.
그렇지만 라이언 머피는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예술' 아닌 '상업'의 범주에 넣어둘 게 분명하다. 수없이 쏟아지는 영상 콘텐츠들, 뭘 봐야 할지 선택하기가 너무 힘든 와중에, 본인 작품이 최고는 아닐지언정 중간은 간다고 천명하고 있는 게 아닐까. 중간이라도 가려면, 어떤 면에서는 최고여야 하는 건 잘 알고 있을 테고 말이다. 선택과 집중이 뭔지 아는 사람인 것이다.
시즌1의 8화에 이어 시즌2 10화 제작이 작품 공개 이전에 확정되었다고 한다. 포장 하나는 '기똥차게' 하는 이의 기대작답다. 개인적으로 시청하기 전에 기대했던 면이 전혀 없어서 당황하고 실망하기도 한 반면 얽히고설킨 관계들 사이에서 예측하기 쉽지 않은 반전이 끊임없이 이어져 계속 볼 수밖에 없기도 했다.
작품을 보는 사람보다 만드는 사람한테 더 좋은 콘텐츠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솔직히, 시즌2가 나오면 '보기 싫은데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라고 할까... 작품을 접하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납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