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한글 있는데"…한자 경조사 봉투 바꾼 성제훈 농진청 대변인
- 입력
- 2020.08.29 04:30
- 수정
- 2020.08.29 08:36
농촌진흥청(농진청)이 한자만 적혀있던 경조사 부조 봉투 문구를 한글로 바꾸는 시도를 하면서 눈길을 끌고 있다. 이 변화를 주도한 이는 한글사랑을 실천해 온 성제훈(54) 대변인이다.
성 대변인은 최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농진청 대변인실에서는 한자로 썼던 경조사 봉투를 한글로 바꿨다"며 바뀐 경조사 봉투 사진을 올렸다.
그는 "우리 글자는 한글이고 한자는 중국 글자"라며 "경조사 봉투에 '結婚(결혼)', '華婚(화혼)', '謹弔(근조)', '賻儀(부의)' 등 한자를 쓰는데 우리 글자가 없다면 모를까, 한글이라는 멋진 글자가 있는데 굳이 한자를 쓸 까닭이 없다고 본다"고 취지를 밝혔다.
농진청이 26일부터 도입한 새 경조사 봉투에는 '祝華婚(축화혼)' 대신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賻儀(부의)' 대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라는 한글 문구가 적혔다.
성대변인은 28일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대학 다닐 때 교재에 한자말이 굉장히 많았다"며 "예를 들어 '다비(多肥·거름이 많음) 하면 도복(倒伏·작물이 비바람에 쓰러짐) 한다'는 말이 있다. 일반인은 알아듣기 힘드니 '비료를 많이 주면 잘 쓰러진다'고 쓰면 좋을텐데 일본식 전문 용어를 그대로 따서 쓰더라"고 말했다.
그는 "공부를 하면서 되도록 한자보다는 깨끗한 우리말을 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됐다"며 "1998년 공직에 들어선 후 2003년부터는 주위 동료들에게 한글을 쓰자는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한 두명에게 보내면서 시작된 '우리말 편지'는 공직 생활을 하면서 점점 늘어나 이제는 받는 사람만 수만 명에 이른다.
그러던 중 우연히 국립국어원 관계자가 성 대변인의 이메일을 접했고, 2007년 당시 문화관광부와 한글학회에서는 그를 '우리 말글 지킴이'로 선정하기도 했다. 성 대변인은 "이전에는 그저 우리말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던 사람이었지만 실천으로 옮겨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우리말을 아끼는 그의 노력이 결실로 이어지기도 했다. 성 대변인은 2011년 한글문화연대와 함께 '불임(不姙)'이라는 단어 밖에 없어 몸 상태를 정확히 표현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 표준국어대사전에 '난임(難妊)'이라는 단어를 처음 올렸다.
요즘에는 '촌스럽다'는 말의 뜻을 확장하려 하고 있다. 사전에는 다소 비하의 의미가 있는 '어수룩한 데가 있다'는 뜻 밖에 나와있지 않지만, 귀촌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시점에 여유로운 삶을 추구한다는 의미 등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다.
사실 성 대변인이 공공기관 경조사 봉투를 한글로 바꾼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앞서 농진청 행정법무담당관실, 산하기관인 국립농업과학원 수확후관리공학과·스마트팜개발과에서도 경조사 봉투에 한글을 새겼다.
그는 "결혼, 애도 등도 따져보면 사실 한자로 구성된 말이긴 하지만 적어도 표기를 할 때는 알기 쉬운 한글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안팎으로 많은 분들이 호응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