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립시다’ 밥 아저씨…사실은 ‘19금 드립’ 선수였다 [왓칭]
다큐 ‘밥 로스: 행복한 사고, 배신과 탐욕’
추억의 밥 아저씨 비화를 파헤친다
넷플릭스 '밥 로스: 행복한 사고, 배신과 탐욕'
입력 2021.09.02
하늘이 코발트색으로 어둑어둑 물들고, 저녁밥 짓는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 오던 시간. 그늘진 거실에 앉아 TV를 켜면 EBS에서 “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를 틀어주곤 했다. 푸들 같은 아프로 헤어, 덥수룩한 턱수염, 셔츠 단추를 세 개나 푼 아저씨가 시공간을 가늠할 수 없는 검은 장막 앞에 서 있었다.
밥 아저씨 소개는 화면 하단으로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지나갔다.
*밥 로스: 미국 플로리다 출생. 18세부터 그림 그리기 시작. 여러 대학에서 다양한 미술 기법 공부. 빠르고 독특한 덧칠기법(Wet-On-Wet)을 개발. 1983년부터 미국 PBS를 통해 미술 강의.
팔레트 나이프가 캔버스 위로 미끄러지며 물감을 토해내면 웅장한 산맥이 펼쳐졌다. 브러시가 서걱서걱 마찰음을 낼 때마다 풍성한 덤불이 자라났다. EBS는 밥 아저씨 목소리 위에 우리나라 남자 성우(김세한) 목소리를 덧칠해 방영했는데, 성우 역시 밥 아저씨만큼 부드러운 음성을 갖고 있었다. 그는 종종 이렇게 귓가를 간질였다.
어때요, 참 쉽죠?
경이로운 미술 쇼에 넋을 잃고 있으면, 엄마가 다가와 등짝을 때렸다. “밥 먹어라. 김치찌개 다 됐다.”
⭐[영상] 밥 로스 ‘그림을 그립시다’ 속 “참 쉽죠?”↓
1990년대 EBS에 등장했다 어느 순간 잊혀진 밥 로스(1942~1995). 누가 봐도 어려워 보이는 그림을 30분 만에 뚝딱 그리고는 ‘참 쉽다’ 주장하던 언택트(untact·비대면) 미술 선생님. MZ세대 사이에서 목소리와 붓질·나이프 소리가 불면증에 좋다는 소문이 돌면서 ‘ASMR(소리와 영상 효과로 심리 안정을 유도하는 콘텐츠)계의 조상님’으로 재평가된 인물···.
그런 밥 로스가 1983년부터 1995년 사망 전까지 미국 PBS에서 진행한 TV 프로그램 ‘The Joy of Painting’(한국 제목: 그림을 그립시다)의 비화를 파헤친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지난달 25일 넷플릭스가 공개한 오리지널 다큐 ‘밥 로스: 행복한 사고, 배신과 탐욕’이다.
‘행복한 사고’는 밥 아저씨가 ‘그림을 그리다 실수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시청자를 다독이며 썼던 표현. “우리는 실수를 한 게 아닙니다. 단지 행복한 사고(Happy Accidents)가 일어난 거죠.” 다큐 제목이 가리키는 ‘배신과 탐욕(Betrayal & Greed)’은 밥이 사망한 이후 벌어진 콘텐츠 지적재산권(IP) 분쟁을 의미한다.
◇Stream or Skip?…볼까 말까 고민될 땐
Stream it! 정주행 시작!
이 다큐는 TV 역사상 가장 성공한 미술 콘텐츠를 만든 밥 아저씨가 림프종 진단을 받고 52세에 사망하게 된 과정, 이후 펼쳐진 동업자와 유족 간의 상표권 분쟁을 조명한다. 작품 초반부에선 ‘콘텐츠 기획자’였던 밥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다룬다.
1942년 미국 플로리다에서 태어난 밥 로스는 열아홉살이던 1961년 공군에 입대해 20년 간 복무했다. 알래스카 공군 기지에서 10여 년 간 주둔할 때는 풍경화를 그려 팔면서 미술에 대한 갈증을 채우기도 했다.
마르지 않은 물감 위에 물감을 덧칠하는 웻 온 웻(Wet-On-Wet) 기법을 그가 최초 개발한 건 아니었다. 밥은 1981년 전역한 뒤, 예전부터 웻 온 웻 기법으로 TV 그림 쇼를 진행하던 윌리엄 알렉산더를 찾아가 그림을 배웠다. 그리고 1982년부터 자기 이름을 내걸고 미술 콘텐츠를 만들기 시작했다.
밥은 애초부터 미술용품 사업, 오프라인 미술강좌 등 수익 전략을 세운 다음 방송에 뛰어들었고, 경쟁 미술 프로그램과 차별화하기 위해 자기 캐릭터를 뚜렷하게 설정했다. 멀쩡했던 머리를 1~2개월마다 지지고 볶으며 복슬복슬하게 연출하는가 하면, 핵심 타깃 층인 ‘성인 여성’을 공략하기 위해 목소리까지 바꿨다.
그는 평소 “나는 미술 강좌를 할 때 시청자와 ‘일대일 상황’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들을 느낀다”고 했다. 주변인들은 밥이 시청자를 향해 침대 위에서 속삭이는 듯한 화법을 구사했다고 설명했다. “부드럽게, 아주 살짝 터치하면서, 캔버스를 어루만져요.” 캔버스 위로 브러시를 조심스럽게 굴리면서 말이다.
⭐[영상] “우린 음란마귀가 아니었어!”…밥 아저씨, ‘의도된’ 19금 모먼트
다큐는 프로그램 명(‘The Joy of Painting’)이 당시 미국에서 유행했던 책 ‘The Joy of Sex’와 흡사하다는 점, 평소 밥이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했으며, 스포츠카에 열광한 스피드 마니아였다는 점도 들춘다. 사업 파트너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다, 두 번째 부인에게 들키게 되는 ‘동심 파괴’ 비화도 등장한다.
Skip it! 건너뛸까?
이 다큐의 한계는 작품 후반부 상표권 분쟁을 다루면서 나타난다. 밥 로스의 아들 스티브 로스의 일방 주장만 담았기 때문이다. 그는 밥 로스 상표권을 가진 과거 동업자 애넷 코왈스키 부부를 상대로 2018년 소송을 냈다가 이듬해 패소했다. 밥 로스 Inc.는 지금까지도 물감, 브러시 및 프로그램 판권으로 매년 수백만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다.
다큐에서 스티브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아 보인다. 젊은 시절에는 아버지의 프로그램을 물려 받기 싫어했다고 한다. 다큐는 밥이 사망한 1995년부터 2018년 소송에 나서기까지 23년 간 스티브가 어떤 법적 구제 절차를 밟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잇따라 동업자 애넷 부부가 밥을 배신하고 파괴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이들의 입장이 제대로 담기지 않은 점이 아쉽다. 제작진은 작품 말미에 동업자 부부의 반론을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간다.
이 다큐를 통해 밥 아저씨도 결국은 미술용품 ‘팔이피플’이었다는 점을 확인하고 나면, 옛 추억이 조금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해외 직구와 온라인 배송 플랫폼, 블로그 마켓이 없었던 때라, 온갖 미술 도구를 실제로 사들이지 못한 건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숨겨진 비화를 들춰내는 다큐멘터리는 이렇듯 시청자에게 오묘한 감정을 안긴다.
개요 다큐멘터리 l 미국 l 2021 l 1시간33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특징 ‘상남자 밥 아저씨’에서 오는 인지 부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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